물안개가 낮게 깔린 어스름한 늦가을이었습니다.
생일이라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고 집에 가려는데 시간이 늦었으니 바래다 주겠다며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으나 말없이 걸었습니다.
그는 걷는 내내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불편해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한적한 벤치에 앉기를 청했습니다.
그러고도 막상 우물거리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그렇게 그리 길지 않은 정적이 흐르고 침묵을 깨고 그가 꺼낸 말은
이 반지 껴줄래. 내가 널 좋아해
꺄~ (지금은 손발이 오글거리네요 ´▽`)
그땐 좋았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과 신입생으로 만나 1학기는 데면데면했지만 큰 이벤트를 겪은 후 2학기에 갑자기 친해진지 두어달 때쯤 됐을 무렵입니다.
사실 저도 그의 고백을 기다렸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튕겼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줘.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그 튕김이 제 인생 마지막 튕김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겨우 이틀을 참고 덥석 반지를 끼고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제 첫 번째 반지네요.
연애 10년 동안 남편은 군대를 갔다가 돌아왔고, 둘 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결혼은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진행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생략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프러포즈'
이것은 두고두고 남편의 아킬레스건이 됩니다.
프러포즈와 함께 또 생략된 것이 또 있습니다.
자그마치 '신혼여행' (이 길고 긴 사연은 좀 더 묵혀두겠습니다)
암튼 둘의 결혼식은 양가 첫째들의 결혼이라 일가친척 총출동, 대학 동기 선후배의 축제, 둘의 직장 동료와 학생들까지 모여 500여 명의 하객 앞에서 즐겁게 치러졌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혼반지를 꼈어요.
이것에 제 두 번째 반지네요.
이후 결혼 13년 차가 된 우리 부부는 오늘이 결혼기념일입니다.
우연히 최근 3년의 결혼기념일을 모두 캠핑장에서 맞이했습니다.
2021년 결혼기념일은 금요일이었어요.
퇴근하고 바로 캠핑장으로 향했고 어둑어둑한 상태에 피칭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초보 캠퍼여서 처음으로 타프라는 것을 치며 꾀나 애를 먹었었답니다.
겨우 설치를 마치고 쉬면서 '오늘 결혼기념일인데 뭐 없나?'는 질문에 남편은 '타프 치는 법을 배웠잖아'라고 야무지게 말했답니다.
그리고 2022년 결혼기념일은 토요일이었네요.
작년에는 타프 드립을 쳤고 오늘은 뭔가 신박한 거 없냐고 물었더니 '축하해. 이제 직접 장작에 불을 붙일 수 있게 되었어'라고 받아쳤었답니다.
한대 칠 수도 없고 그저 웃었지요.
그리고 2023년 결혼기념일은 일요일이었네요.
전날 조촐하게 전야제로 아웃도어 와인잔으로 분위기를 낸 소박한 우리였습니다.
그리고 넌지시 협박을 했었답니다.
'타프와 장작 드립에 이어 내일도 쉰소리로 때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치얼스!'
그래놓고 막상 결혼기념일 아침이 되자 별생각 없이 바나나팬케이크를 굽고 있었어요.
남편은 딸아이 손을 잡고 캠핑장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한참 지나서 나타난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제 손에 왕따시만 한 꽃반지를 끼워주네요.
덤으로 딸아이 반지도 함께 받았습니다.
세 번째 반지입니다. ❁´▽`❁
소중한 제 꽃반지는 설거지하면서 고무장갑 안에서 눌려서 망가져버렸어요.
버리기 아까웠지만 마음만 간직하기로 하고 자연에 돌려주고 왔어요.
이렇게 소박한 행복이 좋습니다.
저는 오늘 세 번째 반지를 받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