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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빙수는 사 먹읍시다

by 행복해지리



(살려주세요)
혹시 거기 우유 빙수 있나요?
그럼 갈지 않은 우유 얼음을 그냥 파실 수 있을까요?
값은 똑같이 지불할게요.
아이가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데 제 실수로 챙기지를 못해서 좀 급하거든요







새벽 5시 눈을 떴다.

전날 엉덩이 한 번을 붙이지 못하고 종일 바빴던 탓에 기진맥진했었다.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누웠다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새벽을 맞이했다. 아이들이 곁에 잠들어 있는 거 보니 남편가 잘 챙겨서 재웠구나 안심도 잠시, 순간 뇌파에 지진을 일으키는 단어가 있었으니


우유 !


젠장.

학교에서 빙수를 만들기 위해 200ml 우유 2개를 얼려서 가지고 가야 한다고 아들이 주말부터 말했었다. 주말부터 얼리면 너무 꽝꽝 얼어서 안된다며 서두르는 아이의 요청을 외면해 놓고 막상 전날인 어제 잊어버리고 잠든 거다. 부리나케 씻고 24시간 문 여는 동네 마트에서 빙수떡과 우유를 사다가 냉동실 구석에 넣었다. 구석에 넣으면 좀 더 얼까 하는 얕은수는 통하지 않았다. 1시간 30분 지난 7시에 흔들어보니 보란 듯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는 생생한 우유가 들어 있었다.


망했다 !


마침 출근 준비를 위해 일어난 남편과 함께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 회의가 시작됐다. 남편이 낸 아이디어는 팥빙수 아이스크림을 사서 보내자는 것이었다. 남편은 씻자마자 집 앞 편의점으로 나갔고 난 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실직고부터.

엄마가 미리 챙기지 않아서 우유가 얼지 않았다... 까지만 했는데 이미 아들 얼굴은 흙빛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팥빙수 아이스크림을 가져가자고 했더니 눈물을 터트려버렸다. 자기는 '우유 얼음' 담당이라 '우유 얼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융통성 없는 아들아 지금 우유가 안 얼어서 가져갈 수가 없잖아...라고 하고 싶지만 죄인은 입이 없다.)


알지 알지, 근데 우유가 얼지 않았으니 지금 빨리 얼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팥빙수 아이스크림이라도 가져가라는 거지. 더 맛있을걸!


씨알도 안 먹혔다. 그때 걸려온 남편의 전화, 집 앞 편의점은 새벽과 아침에는 닫혀있다는 것. 우선 학교 가는 길에 다른 편의점을 훑어가기로 하고 그 사이 준비가 된 아이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이들 학교와 집은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라 평소 남편이 아이들을 차로 등교시키고 출근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늘 빠듯한 출근길에 오늘은 팥빙수 아이스크림을 구해야 한다는 미션이 더해졌다. 마음이 급해서 출근 방향이 달라 혼자 출근하는 나도 남편을 따라나섰다.


등굣길 첫 번째 편의점에 주차. 팥빙수 아이스크림 없음.

두 번째 편의점 주차. 또 없음.

이제 아들의 얼굴은 흙빛을 지나 똥색이 되었다.

이때 남편이 묘안을 제시했다.


빠★에 우유빙수 팔지 않나. 여기서 우유얼음만 팔아달라고 해보자.


바로 전화를 걸어 읍소했다.


(살려주세요)
혹시 거기 우유 빙수 있나요?
그럼 갈지 않은 우유 얼음을 그냥 파실 수 있을까요?
값은 똑같이 지불할게요.
아이가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데 제 실수로 챙기지를 못해서 좀 급하거든요


직원이 잠시 망설이셨지만 내 다급함이 통했는지, 천사였는지 갈지 않은 우유 얼음을 주시겠다고 바로 오라고 하신다. 차를 급히 돌려 집 앞 빠로 향했고 직원은 이미 포장까지 해두신 (안 해주셔도 되는데)우유얼음과 만들어지기 전 팥빙수 재료가 든 패키지를 내어주셨다.


정말이지 땡큐베리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사람 하나, 아니 둘 살리셨어요.

사랑해요 빠★


그 사이 아빠와 함께 학교 앞에 도착한 아들을 만나 우유 얼음을 전달했다. 진짜 우유 얼음인지를 의심하는 아들에게 '밀크 아이스'라는 제품 이름을 확인시켜 주니 그제사 흙빛 지나 똥색이던 얼굴이 환하게 개였다. 휴, 다행이다. 해냈다.


흙빛이던 얼굴이 환하게 개여서 미소를 머금고 등교하는 아들. 발걸음도 가볍구나
곱게 해주신 포장을 마구 뜯어서 우유 얼음만 아들에게 전달. 혹시 완제품이 아닌 상태로 판매한 것이 빠★ 내규에 위배되는 것일까 싶어 모두 모자이크 처리했다.
덕분에 애미는 늦어버렸다. 달리자.
혹시나 얼음을 녹이기 힘들었가바 내심 걱정이었는데 학급밴드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서야 맘이 편해졌다.





필요이상 스펙터클하게 아침을 열었더니 하루가 참 길었다.

이런 날은 빙수지.

만들자.


새벽에 넣어둔 우유는 적당히 얼었다. 포크를 이용해 부숴 사사삭 사사삭 우유 얼음을 만든다. 오늘 받은 스트레스를 여기에 풀겠다는 생각으로 두들겨 패면 10분이면 충분하다. 그 위에 아침에 우유 얼음만 가져가서 남겨진 팥과 빙수떡 패키지를 쏟고 집에 있던 연유를 더해 뚝딱 우유 빙수를 만들었다.

그 와중에 참 맛있네. 얼음 두들겨 패는 재미가 좋았는지 딸아이는 자주 해 먹자고 하는데 난 거절했다.


우리 빙수는 사 먹도록 하자.

고마운 집 앞 빠★에서



비누같은 우유 얼음을 포크로 부수는데 10분 정도 걸린다/ 아침에 우유 얼음 빼고 남았던 팥과 빙수떡
애증의 우유빙수, 그 와중에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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