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사로운 아침이었다.
옷장을 열어 오늘 입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주로 원피스를 골라서 옷 속에 몸통을 쏙 집어넣고 옷 입기를 끝낸다.
패션 감각이 무딘 사람이라 다양한 아이템을 조화롭게 매칭하는 수고가 필요 없는 원피스를 주로 걸치기 때문.
그런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원피스에 외투를 걸쳐야 했는데 도통 매칭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입었다 벗고, 다시 저렇게 입었다 벗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남편이 쓰윽 나타나 적절한 옷을 골라주었다.
아침에는 각자의 출근 준비와 남매의 등교 준비를 겸하느라 서로를 챙기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남편의 조언대로 옷을 입고 바삐 신발을 실으려니 늘 신던 플랫슈즈를 신으려다 발을 뺐다.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갑자기 블링 블링한 구두가 신고 싶었다.
참 신기한 조화라 생각하면서 몇 달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분홍색 화려한 큐빅이 박힌 펌프스 구두를 골라 신고 출근했다.
놓고 왔나 보다 •́︿•̀。
입술이 무척 건조해서 잘 트기 때문에 립밤을 꼭 챙겨 수시로 바른다.
그런데 립밤이 들어있는 파우치를 집에 두고 온 모양이다.
책상 구석에 두고 어제 저녁에 립밤을 넣었다 뺐다 했던 그림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출근하기도 전인데 벌써 입술이 바작 말라가는 기분이라 뭐라도 없나 싶어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여러 립밤을 책상과 가방, 파우치에 넣어두고 쓰는 편이라 한 개라도 들어있기를 바라면서 주머니를 뒤적이니 하나 잡히는 게 있었다.
화려한 발색이 거슬려서 좀처럼 쓰지 않는 립스틱.
고민은 했으나 안 바르는 것보다 낫다 싶어 톡톡톡 입술에 발라주었다.
립밤만 바르던 입술이 갑자기 화사해진 상태로 출근을 했다.
어디 갔지?
손목에는 항상 머리끈이 있다.
언제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을 수 있도록 보일 때마다 손목에 걸어두는 탓이다.
잠이 많은 탓에 늘 출근 준비 시간이 빠듯할 때가 돼서야 일어나니 머리를 감고 충분히 말릴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늘 출근할 때는 덜 마른 머리를 풀고 있다가 충분히 마르면 질끈 묶어버리는데 그때 항상 손목에 감겨있는 끈을 사용한다.
그런데 오늘은 녀석이 없으니 답답하게 머리를 풀고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럴 땐 노란 고무줄이 답인데 그것도 안 보인다.
아니 이게 모야?
무슨 날이야 대체?
조회를 마치고 1교시 수업까지 연이어 해치우고 미닫이 문을 밀고 교무실에 들어가려니 모두의 시선과 질문이 내게 꽂혔다.
요즘 교무실에 간식을 가져오는 선생님들이 많아서 나도 뭐라고 가져와야겠다 싶어 아침에 쫀드기를 가져다 놨더니 이렇게 반응이 좋은가 싶었다.
'그게 콜라겐 쫀드기는 맛이 그냥 그렇고, 오리지널이 맛있더라고요'라고 대답하며 몇 걸음 더 옮겨 내 책상에 도착했다.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려 책상을 바라보고 나서야 내가 동문서답을 했다는 걸 알았다.
커다랗고 화사한 꽃바구니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서프라이즈 ˘◡˘
오늘 결혼기념일이야?
쌤 생일이야?
아니면 남편이랑 사귄 날이야?
나보다 더 신난 같은 교무실 선생님들이 꽃바구니가 배달된 목적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퍼붇었으나 모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결혼기념일은 5월, 내 생일은 11월, 그리고 사귀기 시작한 날은 내 생일 이틀 후다.
오늘은 명징하게 아무 날도 아니었다.
남편과 관련되었을 날들이 모두 아웃당하니 이제는 숨겨둔 애인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짓궂은 추궁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이 어리둥절하면서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과 긴장감에 입꼬리는 미리 귀에 걸릴 지경이다.
기분에 취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빨리 꽃바구니의 정체를 알고픈 사람들이 카드를 열어보라고 성화였다.
꽃들이 품고 있던 카드 안에는
너와 함께한 8,000일 모두 눈부셨다.
라고 적혀있었다.
일(日)이라는 단위의 헤아림은 보통 365일이 최대치다.
이것을 넘어서면 1년으로 환산해 버리기 때문에 그 이상의 날을 일(日)로 카운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8,000일이라는 숫자는 익숙한 단위를 크게 벗어난 탓에 얼마나 되는 기간인지 도통 단위 변환이 되지 않았다.
다만 집에서 늘 남매의 탄생 1,000일 단위를 챙겨 파티를 열어주고 있다 보니 얼마 전 초등 2학년 딸아이의 3,000일 파티를 해준 것이 생각나 그것에 비교해 8,000일이라는 긴 시간을 추측할 뿐이었다.
보낸 이는 쓰여있지 않았다.
하지만 난 나와의 8,000일을 챙기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고마움에 눈물이 고였으나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오후에 타학교로 개정교육과정 연수 출장이 잡혀있었다.
오후 3시경 학교를 출발했다.
갑작스럽게 아침에 신발장까지 열어 신고 나온 블링블링 분홍 구두가 또각또각 소리를 낸다.
그 경쾌한 리듬에 맞춰 걸으니 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층 짙어진 가을바람이 오늘따라 머리 끈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짙은 분홍 립스틱까지 바르고 연수를 들으러 가는거다.
의도치 않게 생머리를 나부끼며 구두에 립스틱까지 한껏 멋을 내고 출장을 간다.
그곳엔 오늘 꽃바구니를 보낸 사람이 먼저 도착해서 내게 손 흔들어 인사하고 있었다.
지난 20여 년 간 나를 눈부시게 해 준 단 한 사람, 내 남편.
남편은 나와 같은 지역, 인근 학교에 근무한다.
동일 과목이라 각 학교 대표로 이번 연수 대상자가 되어 같은 날 출장을 왔는데 그날이 바로 8,000일이었던 거였다.
비록 연수가 목적이었지만 낯선 공간에 남편과 있으니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어 승천한 입꼬리는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사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했고 어떤 것은 무르기도 하며 우연과 필연이 모여 20여 년 전 남편과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20년이 넘어서면서 우리가 올라탄 세월의 시곗바늘의 재깍거리는 운동감에 익숙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익숙함은 늘 내 손을 잡아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느끼는 안정감이라는 것을.
연수를 듣고 나와서 주차장에서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어차피 집에 갈 거면서도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나누고 싶어서 수다가 늘어진 것이다.
운동장을 가득 채운 차량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을 이야기하고서야 각자의 차로 흩어졌다.
오늘 저녁 우리의 만남 8,000일은 무엇으로 기념할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20분 후 집에서 만나자고 짧은 헤어짐이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남편아, 8,000일 동안 서로를 빛내주었듯 앞으로도 우리 함께 반짝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