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을 하느라 퇴근이 늦었습니다.
이런 날은 저녁 식사 준비가 늦어질까 봐 집에 가는 발걸음이 더 급합니다.
퇴근하면서 머리속으로 냉장고 속에 있는 재료들을 떠올려 봅니다.
간단한 야채들 외에 별다른 재료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오늘도 결론은 카레 밖에 없네요.
요리를 잘 못해요.
분명 레시피 보고 그대로 하는 것 같은데 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걸 보면 이것도 재주구나 싶고요.
하지만 제게는 남매가 좋아하는 카레가 있습니다.
카레는 요리사의 능력이 미치는 영향력이 적은 참 고마운 메뉴입니다.
각종 재료를 때려 박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조리 과정과 카레 가루 하나로 맛을 낼 수 있다는 간편함이 매력이거든요.
그뿐인가요.
고기부터 야채, 버섯까지 골고루 먹일 수 있으니 쑥쑥 크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음식이죠.
감동적인 건 설거지 거리마저 적다는 점입니다.
커다란 팬과 각자 먹은 넓은 식기 정도면 되니 마무리되니 카레는 감동입니다.
그러니 요알못 집에 카레가 빈번하게 오를 수 밖에 없어요.
문제는 시간이었어요.
퇴근해서 후다닥 저녁을 해놓고 5분 거리에서 영어 수업이 끝나는 아들을 픽업해와야 했었거든요.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수분 카레
요즘 전기밥통에 무수분 카레를 많이 하시더군요.
모든 재료를 전기밥솥에 넣고 1시간 지나 푹 익은 덩어리 재료들을 으깨주기만 하면 된다는 간편함에 반해 '나도 한번 해봐야지' 맘먹고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겁니다.
헌데, 저희 집에는 전기밥솥이 없습니다.
그래서 쿨하게 두꺼운 냄비를 선택했어요.
그리고 넣으라는 순서를 무시하고 그냥 넣고 싶은 대로 때려 넣었습니다.
고형 카레 세 덩이를 가장 먼저 투입 (이게 화근이 된 거 같아요.)
그리고 풍미를 위한 버터, 칼집 넣은 토마토(그 와중에 요리 좀 하는 척, 나중에 껍질 잘 벗겨지라고 칼집을 넣었네요.), 팽이버섯, 간 돼지고기, 그리고 양파와 당근은 작은 크기로 잘라 넣었습니다.
전기밥솥으로 하시는 경우 모든 재료가 푹 익어서 양파와 당근이 충분히 물러지니 마지막에 쉽게 으깨지더군요.
그런데 저는 냄비에 하는 거라 단단한 야채가 제대로 익지 않을 것 같아 센스 있게(ㅋ) 크기를 줄여 준 것입니다.
참 잘했지요 (๑˃̵ᴗ˂̵)و
이렇게 카레를 준비시켜 놓고 에어프라이기에 초록마을 꿰바로우(소스까지 들어있는 야무진 제품)까지 투입한 후 아들 픽업을 떠났습니다.
아주 순조로운 저녁 준비입니다.
신속하게 아들을 픽업해 와서는 냄비를 열었봤습니다.
맛있는 냄새와 함께 살짝 의도치 않은 향도 느껴졌지만(카레를 모두 퍼 올리고 나서야 이 향의 정체를 알았죠) 일단 무시하고 비주얼을 보니 합격입니다.
재빨리 토마토 껍질을 벗겨주었어요.
미리 넣어둔 칼집 덕분에 훌러덩 쉽게 벗겨집니다.
그리고 토마토와 뭉친 돼지고기 등 덩어리 큰 녀석들을 뭉개주었더니 손쉽게 카레 완성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난과 꿰바로우까지 세팅해 놓으니 정말 풍성한 식탁이 되었답니다.
아이들이 쌍따봉 날려주는 저녁이었어요.
(❛ڡ❛)
다 익은 후 토마토 껍질만 쏙 벗겨주세요 덩어리가 사라지게 방망이질을 해서 마무리합니다.
으악
너 뭐 한 거야?
오늘도 내 새끼들을 잘 먹였구나 흐믓하던 그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리네요.
밥을 먼저 먹고 다 먹은 그릇을 주방에 가져다 놓던 남편의 비명입니다.
ㅋㅋㅋ 미안
참 쉽지 않은데 말이야.
내가 카레를 좀 태웠어.
카레를 태울 수 있더라구요 ´▽`
무수분 카레를 하려면 수분감 있는 야채를 바닥에 깔고 그 위해 고형 카레를 넣었어야 했는데 저는 순서를 파괴했구요.
전기밥솥은 열이 고르게 전달되지만 저는 일반 냄비에 요리를 했기에 열이 바닥으로만 전해진 것도 문제였을 겁니다.
암튼 조건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내 맘대로 했더니 냄비가 까맣게 타버린 겁니다.
일부로 태우려고 했던 행동은 아닙니다.
저도 처음 카레가 탄 것을 알고는 적지 않게 당황했답니다.
하지만 종종 겪는 일이라 곧 받아들였을 뿐이죠.
아들을 데려오고 나서 향을 맡을 때 이미 알았습니다.
탄내다.
재빨리 주걱으로 바닥을 확인해봤더니 카레의 흐물거림이 아닌 의도하지 않은 단단함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뭉친 고기와 덩어리 토마토를 으깰 때 바닥의 그것과 섞이지 않도록 참으로 조심했습니다.
그리고 바닥을 건들지 않고 사뿐히 위쪽만 퍼올려 식구들 밥 위에 올려드렸죠.
덕분에 식구들은 맛난 카레를 먹을 수 있었어요.
다만 미안한 것은 어차피 설거지는 남편일이니 알아서 수습하라고 냄비를 좀 방치를 했을 뿐입니다.
미안하다, 뒷 일을 부탁한다.
다행히 냄비는 무사합니다
남편이 살렸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