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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Jun 06. 2024

날 노려보던 녀석이 찾아왔다

교사라서 행복한 순간

지각을 겨우 면하는 아슬아슬한 출근.

한숨 돌리고 재빨리 업 준비를 하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 느졌다.


"안녕하네요,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날 복도로 유인(?)하는 아이.

어제 그 녀석이다.

교무실에서는 하기 불편한 말 모양이다.

침을 꼴깍 넘겨 긴장을 삼켰다.  

아이가 어제 날 대차게 노려보며 욕하던 순간이 떠랐기 때문.



명색이 지리교사인데.

작년에 지금의 학교에 처음 출근하고 한 달간은 수업 가는 교실을 못 찾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좁은 부지에 건물을 지어놓은 탓지 구조가 복잡하다.

건물 두 개를 구름다리로 연결해  H모양으로 앞건물을 전관 뒷건물을 후관이라 부른다.

교실을 못 찾은 탓은 불규칙한 교실 배치에 있다.

보통 한 층에 한 학년이 딱 맞게 들어가는데 여긴 전관과 후관을 오가며 뒤죽박죽 배치되어 있다.

2학년이 3층 전관에 2개 반, 후관에 4개 반, 4층 전관에 5과 후관에 1개 반이 배치되어 있는 식이다.

계단도 많아서 전관과 후관 건물 각각 양쪽에 계단이 있으니 넋 놓고 오르다가 현재 위치를 헷갈리곤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단거리 이동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조용한 루트를 자주 이용한다.

교무실과 특별실이 건물 좌측에 집중 배치되어 있어서 좌측 계단은 아이들도 교사도 주로 이용하는 공간. 

선택 과목이 많기 때문에 쉬는 시간이 되면 좌측 계단은 교실과 교실을 오가는 아이들로 늘 붐빈다.

상대적으로 우측 계단은 인적이 드물다.

자연스레 커플 출몰 지역이다.


어제.

4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는 최단거리 좌측 계단을 버리고 인적 드문 우측으로 내려왔다.

좌측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급식실이 있다.

4교시가 끝나면 세렝게티 초원 동물들의 대이동을 직관할 수 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급식실을 향해 질주한다.

지축을 뒤흔드는 그들의 행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좀 돌아가는 우측 계단을 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연속 3시간 수업을 한 터라 배가 고파 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그렇게 5층부터 1층까지 무심히 내려가던 중.

아이쿠.

2층과 1층 사이 층계참에서 사뭇 진지한 커플과 대면해 버렸다.

키가 큰 훈남 아이가 양손으로 귀염뽀짝 여자 친구의 조막만 한 얼굴을 감싸 쥐고는 내 기준 허용 범위를 초과하는 초밀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점은 분위기.

여느 커플처럼 꼼냥꼼냥 아닌 뭐랄까 애틋함 안에  분노, 짜증, 답답함이 뒤섞인 사랑과 전쟁 분위기였달까.

암튼 각설하고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학교에서 필요이상 밀착한 남녀를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게다가 난 유고걸것을.


"여기는 학교예요. 적정거리를 유지합시다. "

커플이 점령한 층계참을 지나며 딱 한마디를 던졌다.

교사다운 척했지만 실상은 면구스럽기 짝이 없다.

아무리 학생이어도 그들의 사적인 시간에 끼어들게 되어 민망했고, 평소 학생 커플이라고 해서 스킨십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스스로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

암튼 짧고 굵게 그들이 점령한 층계참을 지나며 위협감을 전하지 않도록 눈도 마주치지 않고 툭 한마디를 던지고는 마저 계단을 내려왔다.

커플이 있던 층계참에서 반층 내려오면 내 목적지였던 1층이었다.

계단이 끝나자 곧바로 모퉁이를 돌아 교무실로 직행하려 했다.

그런데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을 짓거리를 들어버렸다

 

"아이수박족발같네"

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녀석이 선을 넘었.

걸음 후진.

반층 아래 계단에서 반층 위 층계참 커플 올려다봤다.

육두문자로는 울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녀석은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본다.

눈싸움에서 지면 끝이다.

영화 패딩턴에 나오던 눈빛 광선을 발사했다.

다행히 아이는 먼저 슬쩍 꼬리를 내렸다.


'아이씨, 선생님 한테 한거 아니에요 아이씨, 진짜 수박 같네.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족발족발"

나한테 하는 말 아니라는데 이미 필요이상 욕을 먹어버렸다.

뭔가 화가 잔뜩 난 아이, 앞뒤 사정 듣지도 않고 욕했다고 혼낼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보통 이런 경우 지금 이야기를 해봤자 대화의 본질은 없고 감정싸움만 된다.

시간을 벌려 그 사이 감정을 빼는 것이 먼저다.


"몇 반 누구야? 지금은 얘기가 어려울 거 같고,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그냥 넘길 수는 없어. 내가 찾아갈 테니깐 반이랑 이름을 알려줄래?"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담당 못해 씩씩거리는 남친 대신, 상황에 놀란 여자친구가 냉큼 학번과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그들과 헤어졌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 육두문자와 눈빛광선을 발사하던 아이가 날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긴장이 되지 않겠는가.


후다닥 아이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학생이라지만 180cm가 넘는 건장한 녀석은 키작녀인 나를 한참 내려다본다.

이런 상황에 쫄면 안된다 싶어 눈에 힘이라도 주려던 그 순간.

아이가 폴더 자세로 '죄송합니다. 어제 제가 한 행동 많이 반성했습니다.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아침부터 찾아왔습니다. '라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어제의 울그락 불그락 성난 얼굴은 어디 가고 오늘 본 얼굴은 우리 학교 대표 모범생이라 해도 될 만큼 순둥순둥 유순했다.

아이의 길고 긴 사연을 요약하자면 어제 아침부터 연속으로 듣기 싫은 잔소리, 불필요한 오해, 연속되는 수행평가로 인한 피로감 등으로 왠지 모를 짜증이 올라온 날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화근은 바로 앞 시간 4교시에 벌어졌다.

4교시 선생님이 같은 반 커플인 본인들을 놀리는 듯한 발언을 했고 친구들의 박장대소를 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다는 것.

아이는 크게 불쾌했고, 부끄러움이 많은 여친이 어찌할 바를 몰라 힘든 4교시를 보냈단다.

그래서 종이 치자마자 재빨리 층계참으로 피했다는 것이다.  

'아하, 어제 사랑과 전쟁 분위기는 화난 감정을 참으면서 여자 친구를 위로를 하는 상황이었구나'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감정을 억누르고 여자 친구를 달래고 있던 그 순간, 지나가며 던진 잔소리가 아이의 꼭지를 돌게 만든 것.

참았던 감정이 한번 폭발하니 활화산 폭발처럼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왔고 눌러놨던 감정이 한번 터지니 통제가 되지 않았단다.

욕을 한 건 자기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워서였을 뿐 날 향해 던진 건 아니라며, 그럼에도 불쾌하게 해 드리고 예의 없는 행동을 했다며 거듭 폴더 반성을 했다.  

내가 찾을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먼저 찾아와 사과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고 아침부터 내내 날 기다렸던 모양이다.  


참 용감하다.

그리고 똘똘한 아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하고 있다.

현 상황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인지 알고 그것을 용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아이가 참 기특했다.

어른이다.

그래서 고마웠다.

아이의 어깨에 손을 닫게 하기 위해 팔을 최대한 뻗어 쓰담쓰담해 주었다.

먼저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어제 어떤 상황이었는지 설명해 주어서 이해가 된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는 처음부터 참지 말고 중간중간 스팀을 빼주는 것이 좋겠다며 교사다운 멘트를 날리고 아이와 헤어졌다.


기분이가 좋다.

고등학교에 있다 보면 이렇게 성숙한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아이들의 인생에서 크게 성장하는 찰라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다.

홀가분한 마음인지 교실로 향하는 아이 발걸음이 가볍다.

나도 1교시 수업이 왠지 즐거울 거 같다.

앞으로 커플은 놀리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교실로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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