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딸아이가 2년 전, 초등 1학년 때 좋아하던 캐릭터다.
틈날 때마다 조그마한 피규어를 사모아서는 내 앞에 쪼로록 세워놓고 캐릭터 이름을 못 맞추면 엄마를 면박 주곤 했었다.
내가 보기에는 쟤가 얘 같고, 얘도 쟤 같은데.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뭐가 다른 건지 도통 봐도 모르겠는데 딸아이는 성격이며 캐릭터 능력, 이름을 줄줄 뀌었다.
허나 그것도 한철.
티니핑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면서 피규어 사모으기도 금세 멈췄다.
얼마나 다행인지.
요즘은 티니핑이 아니라 파산핑으로 불린다던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일찍 좋아했다가 시들해진 딸아이 덕분에 파산은 면한 셈이다.
평소와 다름업었던 저녁 시간.
알쏭달쏭 캐치티니핑 이름 맞추기가 유행이라면서 남매가 관련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한때 티니핑을 애정하던 딸아이도, 재미로 보는 아들도, 밥 먹다가 덩달아 보게 된 엄마와 아빠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티니핑 이름 맞추기에 빠져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성심성의껏 이름을 작명해 서로 외치고 있었던 것.
그러다 뜬금 아들의 제안.
우리가 직접 하자.
그리하여 우리집에서도 알쏭달쏭 캐치티니핑 이름 맞추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먹던 밥그릇을 살짝 구석으로 몰고 네 식구 옹기종기 모여 노트북 화면을 집중했다.
내가 왜 이런 걸 해야하나 싶었는데 막상 시작하면 진지해진다.
심오한 네이밍 센스를 발휘하기 위해 짱구를 최대한 굴려 캐릭터 이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
경력자 딸아이가 선두로 치고 나가고, 기억력이 좋은 아들이 앞서 본 유튜브 영상을 기억하고 그 뒤를 이었다.
아빠는 무심하게 툭 던진 이름을 한 두 개를 맞췄고, 난 진심을 다해 열심히 이름을 만들어냈으나 무득점의 굴욕을 맞봐야 했다.
그렇게 멋진 승부의 여운을 느끼며 남매와 이야기 나누기를 잠시, 두리번 거리니 남편이 없다.
우리 부부에게는 가사에 대한 암묵적 룰이 하나 있다.
같은 직업의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거의 동시간에 퇴근해서 집에 온다.
저녁 준비는 100% 내 몫이다.
먹성 좋은 남매의 배고프다는 채찍 같은 재촉을 들어가며 퇴근 후 옷만 갈아입고 (어떤 날은 그것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종종거리며 밥을 한다.
사실 대체로 서서 뱃힘으로 말하는 직업이다 보니 퇴근쯤 되면 온몸이 천근만근이다.
거기에 쉴 틈 없이 저녁 식사까지 휘몰아치고 나면 정말 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대신 저녁을 먹고 나면 이후는 모두 남편의 몫이다.
식탁 뒷정리 및 설거지, 음식물 쓰레기까지 그의 몫이다.
그렇다.
저녁 먹고 알쏭달쏭 캐치티니핑 이름 맞추기가 끝난 지금은 내 눈앞 식탁이 깨끗해야 옳았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시선을 옮기면 부엌에서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어야 맞는 경관이 된다.
그런데 오늘은 식탁도 치워지지 않았고 남편도 보이지 않는 것.
그때 남편의 위치를 알려주는 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왔다.
드르렁.
보지 않았으나 남편이 뭐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소리 드르렁.
재빨리 가보니 남편이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와, 반칙이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더니 어느새 아들이 나타나 한마디 했다.
ㅋㅋㅋ
덕분에 웃었다.
슬리핑 덕분에 설거지는 내 차지다.
슬리핑, 너~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이건 추억의 세일러문 버전이다)
(제목이미지출처: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