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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Sep 19. 2024

헌혈의 집에는 드라큘라가 오나?

엄마의 매혈기



엄마, 헌혈의 집이 모야? 
드라큘라가 찾아오는 곳인가? 


교정기를 하고 있는 딸아이는 한 달에 한번 치과에 검진을 갑니다. 

수년째 드나드는 건물이라서 익숙한 곳인데 별안간 '헌혈의 집' 간판이 눈에 든 모양입니다. 

난데없이 드라큘라를 소환한 것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느라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아이의 상상력을 더 뻗어나갑니다. 


'어서 오세요. 어떤 피 찾으세요~' 그러면 드라큘라가 와서 '오늘은 좀 달달한 게 당기네' 하면 당뇨환자 피를 주는 건가? '오늘은 피곤해서 카페인 든 걸로 주세요. ' 그럼 (커피 많이 마시는) 엄마피를 줘야 하나... 


아이가 종알거리는 것이 한참을 듣다가 이내 결심했습니다. 

직접 보여주는 편이 좋겠다, 오늘 가보자 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헌혈하면 주는 떡밥이 있으니 벌써 기분이 좋아집니다. 

영화표도 주고, 간식도 챙겨주니 꿩먹고 알먹기네요.  

영화표는 하나밖에 주지 않으니 핑계김에 혼자 영화를 볼 생각에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했습니다. 

이런 맛에 허삼관이 피를 팔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예약이 되어 있던 치과 검진은 10분 만에 끝. 

곧바로 옆건물에 있던 헌혈의 집으로 향합니다. 

십수 년 만에 방문이라 새삼스럽고 긴장이 되더군요. 

대학 새내기 시절, 친한 친구가 혈액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과 동기들을 우르르 데리고 갔던 이후 오랜만입니다.  

게다가 주사를 무서워하는 편이라 굳이 제 팔에 주사를 꽂으려 발걸음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사는 여전히 무섭지만 아이 손을 잡고 있으니 호기로운 척 헌혈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내부도 시스템도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간단한 헌혈기록카드는 터치식 화면으로 입력합니다. 

이후 1대1로 간호사 선생님과의 상담을 합니다.  

이때 신분증 확인, 전혈 또는 성분헌혈 결정, 문진, 피검사 등이 진행됩니다. 

말라리아 위험 지역을 다녀왔는지, 특히 최근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지도 확인합니다. 


6개월 전에 싱가포르를 다녀왔는데 문제가 될까요?

라고 대답했더니 


싱가포르 어느 지역을 다녀오셨나요? 

되물으시네요. 


싱가포르이요 

라고 다시 말했더니 


그러니깐 싱가포르 중에서도 쿠왈라룸푸르처럼 어느 도시를 다녀오셨을까요? 

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무안하지 않게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라 다른 도시가 없다고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됐습니다. 

그렇게 잠시 난감하던 순간 피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혈색소가 빈혈 수치로 나오는 바람에 싱가포르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이 헌혈 불가라는 겁니다.  

해모글로빈 수치가 12.5 이상은 돼야 헌혈이 가능한데 9도 안된다고 하더군요. 

이 정도면 일상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괜찮냐며 되물으셨습니다. 


전 늘 빈혈입니다. 

앞서 대학 때 과 동기들을 데리고 갔을 때도 저는 못하고 친구들 헌혈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깜박하고 있었네요. 

임신 때는 빈혈이 더욱 심각해서 어지러움을 자주 호소하곤 했습니다. 

핑계로 소고기는 실컷 먹었습니다.  

하지만 일상 중에는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격년으로 하는 건강검진에서도 '빈혈 재검요망'은 늘 빠지지 않고 적혀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습니다. 

병원을 가도 별다른 처방없이 철분제를 줄 뿐이고 위장이 약한 탓에 몇번 먹다가 말아버리긴 일쑤였거든요. 

그래서 제게는 빈혈 상태가 기본값 입니다. 

원래 다 이런 상태로 사는 줄 알 뿐이죠. 

해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이면 엄청 날아갈 듯 가뿐한가요? 

저는 잘 모릅니다. 

정상 수치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비교해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빈혈을 잊고 살았고, 그래서 호기롭게 방문했다가 꼭 철분제를 챙겨 먹으라는 신신당부를 듣고 되돌아 나왔습니다. 

아이에게 헌혈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영화볼 핑계가 생겼다고 좋아하던 상상은 일장춘몽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드라큘라를 떠올리며 재미난 상상으로 방문한 헌혈의 집이었는데, 엄마를 걱정하던 간호사 선생님의 물음으로 딸아이 얼굴에 근심이 내렸습니다. 

엄마가 퍽 안쓰러웠던 모양입니다. 

아이를 달랠 겸, 건강도 챙길 겸 즉시 약국으로 행했습니다. 

헌혈이라는 성과를 없었지만 철분제를 얻어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딸아이는 다른 계획을 세웠습니다.  

헌혈의 집은 아빠랑 가야겠다. 

좋은 생각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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