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브리티시 팝아트
팝아트를 학문으로 접한 것은 학부 졸업반 교양 수업 때였다. 전통적인 가치와 태도에 대한 도전과 실험적인 변화 등이 특징이기에 보는 재미도 크다. 그 그림이 그 그림처럼 느껴지는 중세시대와는 달리 그림 자체가 작가별 상징을 가리키는 팝아트는 시험 답안을 쓸 때 매우 도움이 됐던 기억이 난다. 벌써 수년 전의 이야기가 된 기억을 품고 다시 팝아트를 만나러 전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시에 대한 종합적인 후기는 ‘아쉬움’이었다. 대중의 인지를 위해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름을 메인에 올리기는 했지만 어떤 것도 메인이 되지는 못한 느낌이 들었다. 팝아트를 기대하고 갔다면 하나의 작가가 도드라진 기분이라 아쉬웠을 것이고, 이전의 호크니 전시를 보았다면 그의 비중이 적어서 아쉬웠을 것이다. 같은 내용의 미디어 전시가 매우 짧은 시간에 걸쳐 전시회장을 울리고 있는 것도 몰입을 깨뜨렸다.
느닷없이 등장한 비틀즈의 횡단보도와 네온사인 등도 팝아트를 재현하기 위해 등장했다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같은 공간을 전시 일정으로 재방문하는 묘미는 이 공간이 지난 전시와 어떻게 공간을 다르게 꾸미고 있을까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이 느껴지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이전 전시와 거의 유사한 배열 등이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흥미를 다소 떨어뜨렸다. 작품 설명이 그림 아래에 매우 작게 적혀 있어 선을 넘어갈 뻔한 일도 웃지 못할 고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시절의 향수는 재현됐고, 생각할 거리들도 있었다. 늘 크게 인쇄된 그림만 보다 실물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작아 시선을 기울여 봐야 했던 리처드 해밀턴의 작품이 첫 번째로 시선을 빼앗았다.
팝아트의 시작은 리처드 해밀턴의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정의된다. 콜라주 방식으로 대량소비 시대에 등장한 생산품들을 등장시켰다. 녹음기, 포드 자동차의 로고, 앨 존슨의 얼굴까지 그려져 있다.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물품을 활용했기에 기존의 중산층, 소수상류층을 위한 미술 전시가 대중으로 확대된 계기라고도 풀이된다. 가운데 근육질의 남성이 들고 있는 팝(pop)이 팝아트를 견고하게 만드는 상징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고 배웠다) Popular의 약자로 보는 해석이 다수인 듯하다. 영리하게 배치된 콜라주가 다루는 사회는 지금과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의 통찰력이 도드라진다.
현대미술의 불쾌함과 실험의 대한 이야기는 앨런 존스의 전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앨런 존스의 전시는 대체로 에로틱하고 페티시즘적인 요소를 차용했기에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작품과 영상을 19세 이상으로 분류해 놓고 있었다.
현대미술을 감상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인데, 말 그대로 불쾌함 때문이거나 이해하기 힘들어서다. 존스의 경우 전자였다. 존스는 다리와 하이힐을 테마로 한 연작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특히 여성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제작하고 이를 가구로 만든 <의자>라는 작품이 꽤 많은 지탄을 받았다. 존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여성혐오나 성차별주의를 표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왜 존스의 에로티시즘의 영향을 받는 것은 모두 여자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지 존스의 성적 지향성에 관련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예술의 정석을 불쾌하게 하고자 한 존스의 시선이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느낀 이유는 그가 여성성을 소비한 방식이다. 존 버거의 <way of seeing> 에서는 회화의 역사가 쌓아온 남성 시각에 의해 구성된 ‘누드’를 비판하며 ‘누드(nudity)’와 벌거벗은 몸인 ‘네이키드(nakedness)’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둘의 차이는 목적에 있다.
네이키드는 벌거벗은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누드는 벗은 것을 전시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과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의 해석은 자유로울 수 있으며 현대미술의 의도 역시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앨런 존스의 작품은 여전히 이전의 누드를 재생산한 폭력적인 작품으로 비친 것은 사실이다. 당장 구글 서치에서는 앨런 존스의 작품이 특정 취향자들을 위한 ‘꿈의 가구’처럼 분류되고 있으니.
찌푸린 인상 때문에 이마가 얼얼해질 때쯤, 데이비드 호크니가 나타났다. 가장 좋았던 것은 말미에 있었던 <태양이나 죽음을 오랫동안 볼 수 없음을 기억하세요>. 나는 이 작품을 2021년 봄에 봤다. 엑스코에서 행사가 있어 그 근방을 지나다가 해가 다 져가는 시점에 갑자기 주변이 환해져서 고개를 들었더니 이 작품이 상영되고 있었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1분이 아깝다. 잠시 무언가를 확인하느라 멈춰 서는 시간도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들과 경로가 얽혀 버리는 몇 초도 매우 아깝다. 그런데 짧게 지나가는 영상을 위해 한 5분은 족히 서 있었다. 해가 다시 뜨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멈추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노란 색 불이 켜졌다.
이 전시를 스크린으로 상영한 이유를 찾아보니 더 기쁠 수밖에 없었다. 호크니는 런던 CIRCA의 거리 전광판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기자 간담회에서 “잠시 광고를 멈추고, 즉 잠시 자본주의를 멈추고 상영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태양과 죽음은 오래 바라볼 수 없다는 말은 희망과도 같다. 희망은 대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형상을 하고 온다. 저녁에 갑자기 떠오른 태양처럼. 여러 부분이 아쉬운 전시였지만 원하는 작품 하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국과 영국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 60여점을 포함해 비롯한 영국 팝아티스트 14인의 오리지널 작품, 판화, 사진, 포스터, 영상 등 150여점이 23년 3월 23일부터 7월 2일까지 DDP 뮤지엄 전시1관(지하2층, 배움터)에서 전시된다.
위 글은 아트인사이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