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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Oct 04. 2024

춤을 추자, 마음이 녹슬지 않았다면

로봇드림 리뷰



Do you remember? the 21st night of September? 


당신과 나의 이야기에 대한 수많은 질문으로 이루어진 노래. Earth, Wind, Fire의 September


예전에 초등학교였나 단체로 이 노래에 맞춰서 춤을 췄었다. 플래시몹 같은 뭐 그런 거였던 거 같다. 리듬은 참 신나지만 가사가 슬퍼서 춤을 추는 내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슬픈 노래인데 왜 이렇게 리듬은 신나는 걸까. 춤은 이렇게 신나게 추고 있는데 왜 나는 슬픈 걸까. 


이 질문 때문이다. 


너 그거 기억해? 9월의 춤을? 흐린 적 없던 그날을? 


기억 속에 내가 아직도 존재하느냐는 그 물음에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기억은 취약하고 휘발성이 강해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긴 어려운 추상이다. 그래서 기억에 대한 질문은 대체로 서글프다. 기억의 무게가 항상 같지 않은 이유는 숨은 감정 때문이다. 그리움이라는 감정만큼 기억은 항상 변칙적일 수밖에 없다. 



꿈에서 깰 용기


영화의 제목은 로봇 드림이다. 영어 제목은 Robot dreams. 로봇이 (       ) 을/를 꿈꾼다. 목적어 자리가 비어 있는 곳에 이 제목을 따라 영화에서도 로봇이 꾸는 여러 가지 꿈이 나온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꿈이 겹겹이 쌓인다. 


로봇은 꿈에서 매번 도그를 찾아간다. 그때마다 도그는 다른 방식으로 로봇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로봇과 함께이기도 하고 아무리 벨을 눌러도 내다보지 않는 잔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오마주도 이 상황이 분명한 '꿈'임을 암시한다. 


가장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오마주는 '오즈의 마법사'다. 로봇은 눈 속에 덮여 있던 땅을 뚫고 에메랄드 성이 있는 꽃밭의 세계관으로 들어간다. 환상의 나라 에메랄드 성은 사실 거짓으로 점철된 마법사 오즈가 사는 곳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꽃들과 도그의 집에 도착하자 집은 세트장처럼 엎어지며 다시 로봇은 꿈에서 깬다. 여전히 차가운 얼음 아래.


모든 장치들이 재회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우리는 로봇의 꿈으로 빨려 들어가 그들의 재회를 응원하게 된다.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간절하게 원했던 것들은 가끔 꿈에 나온다. 꿈에서 나는 계속해서 'if' 문법을 반복한다. 내가 잘못 선택한 것들을 돌이키고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그러나 그렇게 꾼 꿈이 해피엔딩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꿈을 꿀 수 없다고 했던가. 로봇은 결국 꿈에서 도그에게 도달하진 못한다. 현실에서 로봇은 도그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꿈에서 깰 용기는 필요하지 않다. 꿈은 언제나 그랬듯 느닷없이 깨는 거다. 



상실의 치료제와 노스탤지어


우리는 과거를 끌어안고 산다. 그 포옹의 크기는 각자 다를지도 모르지만 과거 없이 생겨난 현재는 없다. 로봇드림을 그런 방면에서 참 개인적인 경험의 서술이다. 개별로 맞이하는 상실의 시대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아프더라도 슬프더라도 물리적으로 시간은 흐르는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로봇드림에서는 헤어짐의 장소로 코니아일랜드를 비춰준다. 내게 코니 아일랜드는 가본 적 없는 곳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참 좋아했던 브리트니 머피의 작품 중 하나인 '업타운걸스'에서는 누군가와 아이답게 놀아본 적 없는 레이가 철들지 못한 사교계의 왈가닥 몰리가 함께 코니 아일랜드로 떠난다. 내내 몰리를 무시하던 결벽증 꼬맹이가 마음을 여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아무것도 기대와는 일치하지 않았던 실패한 여행인데도, 찬란한 빛깔 하나 없는 비수기의 불 꺼진 놀이공원이었음에도. 레이는 큰 상실을 겪은 후 코니 아일랜드로 도망친다. 갖고 있던 거의 유일한 좋은 기억 속으로 도망친 것이다. 


영화의 배경인 뉴욕에서는 9.11 테러로 사라진 쌍둥이 빌딩도 함께 우뚝 서 있다. 미국 대륙 전체에 상실이라는 아픔을 줬던 기억을 감독은 영화 안에 투영하면서 잊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녹여냈다. 


프로이트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 더 와닿는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데리다는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이며 애도는 실패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천천히 부재(不在)를 짚어가는 상실의 치료제는 의외로 기억일지도 모른다. 




춤을 추자, 마음이 녹슬지 않았다면



로봇드림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다. 미결인 상태로 종료된 것도 하나의 종결이라는 결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자신을 깊은 바다 안에 묻어버린 서래의 사랑처럼.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그대로 흘러가 버리는 끝이 더 많다.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어도 계절은 흐르고 시간은 지나간다. 엄마는 아직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친구의 연락을 기다린다. 같이 지냈던 그 좋았던 기억들을 돌이키면서 언젠가는 연락을 해주길 기다린다고 했다. 


로봇과 도그에게도 단 한 번의 9월이 주어진다. 해변은 그날을 마지막으로 다음 해 6월까지 폐장됐고 로봇은 해변에, 도그는 다시 혼자 집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만남을 시도했지만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단호하게 그들의 재회를 막는다. 참 영화적인 문법이다. 찰나의 순간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는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로봇드림은 이상하게 자꾸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든다. 


이 이별에선 남겨진 쪽이 담담하다. 붕괴되거나 무너지지 않고 그저 가만히 해변에 누워 가끔 도그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기다릴 뿐'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찾고 헤매어도 찾는 대상이 직접적으로 앞에 나타나주지 않는 이상 쫓는 사람은 여전한 관계적 약자다. 로봇을 기다림의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우리는 감정과는 좀 더 유리된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에게 처음 영화를 보여주고, 롤러스케이트를 같이 타고, 바다를 봤던 기억들을 꿈에 반영하면서 계절을 보내는 로봇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감정이 요란스러운 건 이쪽이다.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픽션적 장치가 이들을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기다림의 끝은 어디일까.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도 그들은 이전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다. 도그는 새로운 반려로봇을 데려왔다. 로봇은 새 친구 라스칼과 함께 살게 된다. 그들의 삶은 이전과는 연결되지 않은 완전한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연결된 기억들이 있다. 


도그는 다시 새로운 로봇과 해변에 간다. 다만 이번에는 기름 스프레이와 함께다. 혹여 물에 닿을까 본인이 물가로 걷기도 한다. 로봇은 라스칼의 손을 아프지 않게 잡는 법을 배웠다. 새로운 몸이 된 붐박스에는 로봇의 플레이리스트와 라스칼의 플레이리스트가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만 같이 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님을, 그렇다고 모두가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과정이다. 


로봇드림에서 모든 등장인물은 보통명사로 그려진다. 이름이 있는 건 라스칼 하나다. 라스칼이라는 이름에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가 해서 찾아봤지만 단어 자체에 숨겨진 뜻은 없는 것 같다(있다면 알려주세요). 새로운 '이름'의 등장은 도그와는 달리 로봇에게 맞는 새로운 몸을 찾아주고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해서 고쳐주는 애정이 돋보이는 새로운 등장인물, 새로운 사랑과 관계의 시작이다. 둘 사이는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조립으로 생명을 부여했던 도그와 창작으로 생명을 부여한 라스칼의 대조도 짚어볼만 하다. 너구리가 아니라 라스칼인 이유는 어쩌면 로봇의 선택을 미리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람 옆에 남기로 했어. 이 사람은 '이름'이 있어. 




새로운 로봇과 지나가는 도그를 본 로봇은 쫓아가 가 그의 어깨를 잡아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대신 뒤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라스칼을 뒤돌아 본다. 그러고는 도시가 울리도록 그들의 노래를 튼다. 


너 기억해? 9월 21일의 그 밤을? 


로봇이 튼 노래는 질문이었다. 너 기억해? 나를? 그 질문에 도그는 춤으로 화답한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은 이제 따로 같은 춤을 춘다. 로봇의 기다림은 이제서야 완전히 끝난다. (여기서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9월이 지나갔다. 10월이 왔다. 10월이 지나고 12월이 온다고 해서 9월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끝나는 건 아니다. How we knew love was here to stay...사랑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September의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서글픔과 슬픔도 점차 가시는 듯 하다. 


함께이면서 성장할 순 없었는지. 자꾸만 묻게 된다. 내 무지가 상대방을 다치게 했다는 후회는 종종 발목을 잡으며 유리창에 비친 그 후회의 얼굴을  가끔 떠올리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다시 기억으로 살아간다. 살아가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고 담을 수 있는 단어들을 제자리에 끼워넣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의 평을 빌렸다. 세상에는 미안해가 아닌 고마워라고 말하는 이별이 있다. 토이스토리3의 앤디와 장난감들처럼. 마음이 녹슬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 춤을 추겠느냐고 묻는 다정한 마침표도...그 춤이 끝나고 나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도 그렇게 서운할 것 같진 않다. 


우리는 이야기를 쓸 수 있다. 함께 해도 함께 하지 않아도. 영원하지 않을지언정, 그러니까 대신 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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