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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Jul 22. 2024

중고서점을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

비정기적 우편함


서점을 들어가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그것이 신간을 파는 곳이든, 누군가가 놓고 간 책들이 기다리는 곳이든. 


 그렇지만 한동안 중고서점을 자주 가던 이유는 하나였다. 실물의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과 더 이상 보관할 공간이 없다는 현실의 타협점. 이미 누군가의 손을 떠난 만큼 내 손을 다시 떠나더라도 그렇게 섭섭해하진 않을 책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런 거라면 내가 필요할 때만 데이터로 존재하고 그 외엔 인터넷 세상을 떠돌아도 아무 상관 없는 이북(e-book)을 보는 편이 나을 수 있다. 


그렇지만 책 한 페이지를 읽을 때 나머지 손가락으로는 앞으로 읽어갈 페이지들의 모서리를 하염없이 쓰다듬는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습관이 남아 이북을 읽을 때도 내 커서는 하염없이 앞으로 읽어야 할 공간을 두드리며 내 시선을 재촉하고 있다. 그 손맛을 찾기 위해 나는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꽃으로 얼룩진 책


먼저 비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얼마 전에는 기막힌 실수를 하나 했다. 

 

나는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진 것 중 벌레가 살지 않으면서 온전한 모양의 꽃을 찾아내는 날이면 집으로 가져가는 습관이 있다. 공기에 살짝 말린 다음 굵직한 연습장에다가 끼워두고 잊어버리고 나면 다음 연습장을 펼 때쯤 무작위로 눌려있는 꽃을 발견할 수 있다. 


모음의 신이 그렇게 하나둘씩 모은 것들을 가끔 찾아오는 비움의 신이 무자비하게 쓸어내는 것이 문제긴 하다. 대부분은 잘한 일들로 귀결되지만 종종 실수도 하는데, 이번은 명백한 실수였다. (어그러진 꽃을 마주한 담당자님들께...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에는 잘 펼쳐보지 않는 책이 희생양이 됐다. 책에는 압화를 잘 안하는 편이다. 생화의 경우 눌리면서 얼룩이 생길 수도 있고 더군다나 여러 책을 자주 꺼내보는 편이기 때문에 압화가 제대로 안된다는 문제가 생기기 떄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1년 내내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었고, 내가 그 속에 품어져 있던 꽃을 까맣게 잊은 덕분에 비움의 신이 점지한 '비움'에 함께 한 것이다. 당연히 책은 한껏 오염되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무슨 정신으로 그 책에 꽃을 꽂아뒀는지, 심지어는 무슨 꽃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더 부끄럽다. 책은 결국 '사이에 꽂힌 꽃으로 인한 오염'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폐기되고 말았다. 


 중고서점은 이렇게 기억에서 멀어질 준비를 마친 책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중고로라도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이 낫다고 해야 할지, 파양 당한 책의 삶을 슬퍼해 주어야 할지...그런 공간이 어느 순간부터는 운명적인 만남의 가능성을 품은 희망찬 곳이 됐다. 


따로와 꿈 도둑 판매 정보. [사진=알라딘 중고서점 홈페이지 갈무리]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


이번엔 채움에 대한 이야기. 중고서점만 보면 홀린 듯이 들어가게 된 건 한 동화책 때문이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방문했을 때였다. 알라딘에는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이라는 서가가 있다. 저녁 미팅을 가기 전에 잠시 시간이 비어 들어간 곳에서 나는 어릴적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을 발견했다. 


어린이 동화책 중에선 명품으로 꼽히던 '세계의 그림책' 시리즈에 있는 '따로의 꿈 도둑'이라는 책이다. (아시는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동화책을 읽던 성우의 목소리가 귀에 선명한데 그 책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가 그런 그림책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세상에 그런 동화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그 동화책을 발견한 곳이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이었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을 삼키고 책을 집어 들었다. 책 제목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빠르게 어린시절로 소환됐다. 순식간에 책 한 권을 다 읽어삼킨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걸 잊고 살았을까. 듣고 또 들어서 버벅거리는 CD 앞에서 고장나지 말아달라고 빈 적도 있었는데. 


고민했던 이유는 책의 상태였다. 책 기둥이 거의 무너져 내려 오래되고 상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그 이유로 책을 포기한 것이 아주아주 후회된다. 



지금은 전국 중고서점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 됐다. 방법은 전집을 한꺼번에 구매하는 것뿐이다. 간절함이 부족했던 바보에게도 두 번의 기회는 있지 않을까. 모든 사이트에 책에 대한 알림을 켜놓고 중고서점이 보이는대로 들어가고 있다. 또 한 번의 운명 같은 만남을 기다리면서. 



이런 마음으로 중고서점에 가다 보니, 바람이 하나 생긴다. 책을 팔 때면 내가 다음에 두는 책도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버리는 바람에, 너무 알맞은 주인과 함께인 바람에 재고가 없었던 그 마지막 한 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이번주 퇴근길, 혹은 지나가는 길에 중고서점이 보인다면 한 번 들러보는 건 어떨까. 잊고 살았던 페이지가 갑자기 펼쳐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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