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로 자란 사람의 독서법

제인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 서평

by 유수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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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동화가 내 성장의 근간이 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동화의 자취를 유난히 민감하게 포착하는 편인데 루스 윌슨의 읽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책 하나가 인생을 뒤흔들 만큼의 충격을 주었던 경험은 아마도 10대에 멈춰 있다. 그 시절의 나는 책을 오래, 그리고 조심스럽게 읽었다. 문장 하나가 왜 그 자리에 놓여 있는지를 생각하며 읽었고, 작가가 설계한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온몸으로 전율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읽었던 책들 대부분은 동화이거나, 동화적인 결을 지닌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 내 성장의 퍼즐 속에 동화가 끼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읽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잠재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삶의 어떤 순간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윌슨이 말하듯, 독서는 결국 자신의 삶과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책을 읽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나는 책을 반복해서 읽는 독자는 아니다. 대개는 빌려 읽고, 마음에 드는 책만 골라 사서 책장에 꽂아 둔다. 그리고 다시 펼칠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라, 필요해진 문장이나 감정이 있는 부분만을 꺼내 읽는다. 그것은 독서라기보다, 기억 속에 저장해 둔 무언가를 다시 호출하는 일에 가깝다.


제인 오스틴을 그런 방식으로 '사용'해온 루스 윌슨의 일대기는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같은 작품을 다시 읽으며 그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기록해가는 방식은, 독서를 통해 삶의 궤적을 되짚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였다. 다시 읽기에 대한 반응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의 결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글의 말미에 등장하는 제인 오스틴 독서요법은 유쾌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독서요법의 면허 소지자는 '문학 약사' 제인 오스틴. 부작용은 새로운 통찰로 인한 일시적 불편감. 추천 연령대에 따라 작품들이 처방전처럼 정리돼 있다. 내가 몇 번이나 시도하다 끝내 완독하지 못한 '오만과 편견'은 속앓이에 효과적인 치료제로 분류된다. 10대에는 1회, 이후에는 평생 연 1회 복용 가능. 효능은 유머 감각 회복, 판단력 향상, 회복 탄력성 강화. 이미 10대는 훌쩍 지나버렸으니, 작가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와 다시 웃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이 책을 꺼내보라고 권한다. 언젠가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 역시 오만과 편견을 다시 펼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30대를 지나고 있는 나에게는 '설득'이 추천됐다. 활력과 외양의 쇠퇴, 감퇴 증상에 처방되는 책으로, 그 속에서 긍정과 애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30·40대에는 연 1회, 그 이후에는 원할 때마다. 올해는 설득을 먼저 읽고 그 부작용인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에서 오는 불편감을 미리 겪어볼 생각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식으로, 30대에 접어둔 페이지를 40대의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상상해보는 일 역시 꽤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 같다.


독서는 나에게 여전히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이자, 과거와 은밀히 손을 잡는 일이다. 동화로 시작된 읽기는 삶의 여러 지점에서 다른 얼굴로 나를 다시 찾아온다. 다시 읽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문장들은 이미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고, 책을 다시 펼치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시점의 나와 마주 앉게 된다. 제인 오스틴을 약처럼 권하는 이 독서요법이 마음에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은 나를 대신 고쳐주지는 않지만, 내가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건네준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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