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블블랭크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 작곡가는 살아있다.
왜 프로그램 이름을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지었을까 궁금했다. 크리스마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선물이다. 실제로 프로그램 소개도 무대가 관객, 작곡가, 연주자 모두에게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게요, 정말 저도 선물을 받고 싶어요, 요즘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무거울수록 무언가를 선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지간해서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 바위가 됐다. 그래도 여전히 문화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모든 형태의 문화를 사랑하고, 문화는 언제나 내게 선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여름을 함께 해주고 있는 아트인사이트의 문화 초대는 예측할 수 없는 깜짝 선물이다. 나름 문화 예술을 즐기며 살았다고 자부했는데도 처음 겪는 것투성이다. 예술의 전당을 가본 것도 처음이었다. 해가 지는 시간의 예술의 전당은 예뻤고 계단을 올라가면서 부는 바람은 시원했다. 그러니까 공연을 보러 가는 여정부터가 선물이어서, 따로 선물을 받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공연의 소감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 한 편을 보고 온 것 같았다. 음악으로 어떤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도 음악마다 장면이 생각날 만큼 생생한 부분들이 있었다. 급박하게 쫓기는 듯한 스릴러, 몽환적인 풍경, 인물이 고난을 헤쳐나가는 듯한 장면까지.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을 소개한다.
Moondust
뮤지컬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뮤지컬 밑의 오케스트라 석에 앉아 이미지가 아닌 소리를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달의 먼지. 이름부터가 몽환적인 데다가 실제로 달을 연상할 수 있는 소리들이 삽입되어서 넋을 놓고 들었다. 악기 하나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달의 먼지는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고 거칠다고 한다. 이름은 낭만적인데도, 달의 먼지는 달의 탐사를 어렵게 만들고 우주비행사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미세먼지나 마찬가지라고.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환상과 환영은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달의 먼지를 낭만적이고 신비롭다고 생각했던 나처럼. 초월적인 존재인 달 밑에서 그것을 더 잘 알기 위해 배회하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Soaring Soul
지휘자가 없이 진행된 공연이었다. 더블베이스와 첼로가 무대에 등장하고 바로 음악이 시작됐다. 악기 두 가지로 얼마나 다채로운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이 머쓱할 정도로 꽉 찬 사운드였다. 클래식이라 하면 잔잔하고, 서정적인 흐름을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이 곡은 그렇게 뻔하지는 않았다. 클래식이 아니라 락 공연장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묵직하고 힘 있는 공연이었다.
낮은 음들의 급하고 박력 있는 전개는 soaring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기도 한다. 급상승하는, 날아오르는, 원대한이라는 뜻을 가진 활동적인 단어. 가끔은 메타포가 들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보다는 직관적인 소개로 하여금 공감을 일으키는 방법이 먹힐 때가 있다.
묵직하고 불규칙한 소리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만든 정확한 타이밍들은 그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만들었을 합의 시간을 느끼게 했다.
다시 문화 초대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나는 문화 초대 중 ‘공연’으로 분류되는 초대에는 대부분 응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공연은 영화나 책과는 다르게 창작자와 관객이 한 공간에서 새로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자 시간이다. 같은 내용을 담은, 같은 사람이 하는 공연이어도 내가 참여한 시간은 다시 재생될 수 없는 순간이다.
모든 사람이 숨죽이는 순간이 좋다. 어떤 만남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채로 어두워진 공간 안에서 무대가 다시 밝아지길 기다리는 시간이 설렌다. 직접 대화를 하지는 않지만 원만하게 소통이 된 것 같은 공연을 보고 나면 어김없이 그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도 그 기록을 남기고,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8월의 크리스마스, 나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