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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부신 Dec 23. 2023

서로의 노력을 폄하하지 않는 마음

돌아보면 운이 좋았다. 한의사로 보낸 6년의 시간 동안 대체로 좋은 대표원장님을 만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지냈다.


그래도 퇴직 후 원장님을 따로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 직장의 1년은 아마도 업무량이 가장 많고 여러 방면으로 시달리던 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개원 멤버로 시작해 합을 맞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혼돈 속에서도 이상하게 원장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묘한 믿음이 갔다. 원장님은 언제나 상대의 말을 먼저 들어주었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의 노력을 폄하하지 않았다. 그러한 신뢰관계를 준 고용주는 그가 처음이었다.


다른 원장님들과 비교해 무엇이 다를까? 사실 우리 사이에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러 오해 속에서도 원장님에게만큼은 실낱같은 믿음이 있었다. 적어도 내게 일방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실 거라는 믿음. 그러한 결정에는 무언가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이러한 믿음의 시작은 첫 출근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의원을 오픈하던 날 원장님이 건넨 이야기 말이다.


내가 당신들을 아주 많이 귀찮고 힘들게 할 텐데 그 때문에 마음 상해도 나는 어쩔 수 없다고. 본인이 내리는 결정은 모두 환자와 치료를 우선으로 두고 내린 결정이니 우리는 치료를 하는 업장으로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그 후 원장님은 태초의 선언대로 언제나 환자를 최우선으로 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내게 있어 이것은 무척 신선한 일이었다.


지금껏 근무한 한의원에서는 위기가 닥쳐와야만 무언가 변화를 꾀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대개 매출과 관련된 문제에서, 꾸준히 환자와 치료를 관심에 두고 내린 결정이라기보다 오로지 지금의 실리를 위해 결정한 문제이곤 했다.


때문에 그러한 변혁에 직원들의 진심 어린 공감과 동의는 언제나 먼 일이었다. 그저 시키니 따르는 것이 태반인 셈이다.


-


원장님은 내가 일을 그만둔 이후에도 종종 자신의 소식을 전했다. 셋째의 출산 소식과 한의원이 잘 자리 잡고 있다는 소식 같은 것들 말이다. 그때마다 함께 일군 첫 1년을 회상하며 나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것이 참 많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오늘 오랜만에 함께 점심을 먹으며 원장님은 다시 또 내게 섭섭하게 대한 것이 못내 신경 쓰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억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기억하는 1년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했어도 원장님이 항상 나를 귀히 여겨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대하는 태도든 급여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서든, 원장님은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내게 너른 마음을 내어주셨다.


서로를 향한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그리고 이러한 인연의 존재가 참으로 귀하다. 언젠가 나만의 업장을 꾸려 함께 일할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 꼭 내가 받은 너른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원장이 되고 싶다. 서로의 노력을 폄하하지 않는, 우리가 일구어가는 이 멋진 일들을 귀히 여길 줄 아는 마음.


매서운 겨울, 1년 만에 걷는 퇴근길은 유독 따뜻하다.

22.12.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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