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방은 어떤 사랑으로 채워져 있나요?
작업실 책장 한편에 다 써가는 향수병이 하나 놓여 있다. 여름이 올 때면 꺼내 썼던 익숙한 향이다. 병은 비었지만, 그때의 감정은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덥고 습한 여름 저녁의 공기, 바람처럼 스쳐가던 마음들. 수박의 시원한 향을 담은 이 향수는 작년 일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다.
향수를 비롯해 인연이 된 물건들이 있다. 내 방에는 오래된 것들이 많다. 수려한 붓터치가 매력적인 셔츠, 메모를 위해 반듯하게 깎아둔 몽당연필. 닳고 낡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나를 닮아가는 것들이다. 과거의 내가 사랑했거나,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것들. 그 곁에 오래 머무는 일은 고집이라기보다, 지금의 나를 아끼는 태도에 가깝다.
누군가를 만나면 나는 그의 안부보다도 요즘의 취향을 먼저 물어보곤 한다. 커피를 마시려다 한 손에 든 채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가끔은 귀엽다. 그런 취향은 어느새 공간을 가득 메우는 향기가 된다. 늘 같은 섬유유연제를 써서 물로만 빨아도 향이 남는 옷처럼.
흉내 낼 수 없는 건 스타일이 아니라, 그 스타일을 고르기까지의 망설임이다. 선택 이전의 침묵과 반복 이후의 확신. 머리를 쥐어뜯으며 밤을 보냈던 고민들. 그게 배어 있는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묘한 기세가 있다. 나는 그 조용한 고집이 좋다. 흔들리지 않는 무게라기보다, 흔들리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 그의 공간엔 익숙함이 있고, 그 익숙함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
오래된 것들 속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아간다. 무심히 반복해 온 선택들이다. 그 속에 고인 시간들. 그건 나만의 취향이고, 나만의 말 없는 언어다.
오랜만에 책장 한편에 있던 향수를 가볍게 뿌려본다. 그 안에 녹아있는 추억이라는 향 하나가 오늘의 나를 잠시 멈춰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