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의 여름
영화는 인생입니다.
길든, 짧든,
영화를 볼 때면 늘 나를 그 속에 넣습니다.
닮았든, 닮지 않았든.
영화와 함께 저의 이야기를 몇 편 더 해보겠습니다.
1990 , 드라마 , 프랑스 105분
감독 : 이베스 로베르트 출연 : 필립 꼬베르, 나탈리 루셀, 디디에 페인
“마르셀의 여름”은 방학을 맞은 영특한 도시 아이의 성장 드라마입니다. 후편으로 나온 “마르셀의 추억”과 함께 소년의 일대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됩니다.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영화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세상 이치를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과정을 담당하지만 유머러스하게 그립니다.
완전체로 믿었던 아버지가 알고 보니 다른 사람과 같은 허점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진정한 인간애를 깨달으며 또 한 번 성장합니다. 100년 전 프랑스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오히려 더 많이 닮아있어 공감이 쉽습니다. 영화의 백미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입니다. 촬영지 오반느 (Aubagne) 마을은 지금도 영화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마르셀의 여름은 원작 소설이 더 유명합니다. 프랑스 국민 도서로 영화를 만들 때 가능한 책을 그대로 옮기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며 아이들과 함께 보아야 할 추천영화입니다. 영화의 원제목은 “내 아버지의 영광”.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제목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오래전부터 생생하게 기억되는 꿈을 꾸는 때가 극히 적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줄거리조차 찾기 모호한 꿈도 꾸어 본 지도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어린 시절 고향의 꿈만은 아주 선명하게 꾸는 날이 있습니다. 그 꿈을 꿀 때면 저는 세월을 거슬러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있죠. 시리도록 맑은 샘이 돌 틈을 흐르는 계곡을 지나 -계곡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은- 싱그럽기 그지없는 풀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산속에서 소를 몰고 다니는 꿈입니다.
풀숲을 헤치는 소의 요령 소리가 절렁 절렁 귓가를 스치고, 등에 진 주루막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을 만큼 적당히 어깨를 누릅니다. 이름 모를 들꽃이나 신기한 버섯, 모양새가 유별난 벌레, 괴이한 모양의 나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뛰어가는 산토끼, 신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노루, 안경 쓴 너구리, 털 고운 담비, 도토리 줍는 다람쥐. 가시 덤불 속의 빨간 산딸기, 조롱조롱 매달린 검은 머루, 덜 익은 다래. 온갖 형태를 만들며 떠다니는 구름…. 한눈을 팔다 저만치 사라진 소를 찾아 싸리 숲을 헤치며 정신없이 뛰어가노라면 인기척에 놀란 꿩이 발밑에서 푸드덕 날아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내 고향 강원도 삼척하고도 도계읍 하고사리. 이곳에서 한나절 가쁜 숨을 헐떡이며 오르면 해발 1,200M가 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산 정상이 좁쌀 육백 말을 뿌려 경작할 수 있을 만큼 넓다 하여 이름 지어진 육백산. 이 산은 저의 어린 꿈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산입니다. 워낙 첩첩산중이라 알려질 이유가 없었는데 한국의 숨은 비경으로 무건리 이끼 계곡이 소문나면서 근간 유명해졌습니다. (이 산을 오르는 길에 무건리 이끼 계곡이 있습니다) 이 길의 반대편으로 오르면 도계읍 황조리라는 곳에 몇 년 전 강원대학교 삼척 분교가 들어서서 이제는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 산과의 인연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입니다. 첫 만남이라는 말을 하면 아련히 떠오르는 기억이 이곳입니다. 아마 제가 글을 잘 쓴다면 이곳에서 이야기 하나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도, 알퐁소 도테의 별도, 마르셀의 여름도…. 육백산 속에서 지나온 날들만큼 아름답진 않았습니다. 아~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어중간한 이야기로 옛 기억을 흐릴 바엔 차라리 그대로 묻어 두렵니다. 아무튼, 또 하나의 우리 집은 육백산 작은 중물이라는 계곡에 있었습니다. 그곳엔 늘 어머니가 있었고요. 여러 가지 약초를 재배하고, 십여 마리의 소를 키우고, 자급자족을 위한 곡식과 채소를 심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라야 7살도 채 안 된 그야말로 어린애였습니다. 만다섯 살, 주변에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입학하자 너무 심심하고 심술이 났습니다. 며칠을 조르고 졸라 집 앞 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합니다. 교장 선생님과 아버님이 한 잔 걸치면서 한 약속은 이러하리라 짐작해 봅니다. “우리 막내 놈이 떼를 쓰니 뒷자리에 며칠 앉혀두었다가 돌려 보내주쇼.” 영특한(?) 웃/비아/는 그 며칠이 그대로 2학년까지 갔고 6학년 졸업을 해버렸습니다. 문제는 졸업 후 나이가 적어 한해를 쉬고 중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영특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라 나름대로 근거가 있습니다. 저 사진 잘 보면 왼쪽 가슴에 은박 줄 세 개가 그어진 견장이 보이지요? 그건 반장 표시(?)입니다. 하하. 제가 학교 다닐 무렵 우리 반에는 열 살이 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청강생으로 들어간 일 학년 때만 빼고 5년 내내 훈장 달았던 웃뺘가 영특하지 않습니까? 헐~.....
제 기억으로는 육백산 가는 길이 정말 멀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산기천을 지나 꼬불꼬불 계곡 길을 걸어 오르면 어디에서 끝날지 모를 장벽 같은 산 아래 닿았습니다. 그 사이 몇 번을 쉬며 왔는데 아직도 산은 한 발자국도 오르지 못했답니다. "자~ 이제부터 신발 끈을 조여 매라." 5학년이 된 형은 등에 무언가를 걸머지고도 나보다 빨리 걷습니다. 3학년 누나도 벌써 울상입니다. 야무진 형은 능숙하게 초입을 찾아 동생들에게 채근합니다. 숨을 헐떡이며 화전을 따라 오르는 길은 정말 죽을 맛입니다. 지금도 그 가파른 곳에 감자를 심고 옥수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궁금하답니다.
숨쉬기 어려울 만큼 가파른 길을 끝없이 오르다 보면 산 중턱쯤 오두막 한 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언덕을 묵밭이라 부르고 이 집을 묵밭등집 이라고 불렀지요. 첫날은 그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습니다. 전깃불은 고사하고 밤에 호롱불도 안 켜서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녁 식사는 대단했습니다. 감자와 수수, 귀리를 섞어 지은 범벅에 열무김치. 난생처음 -비록 7년도 못 살았지만-보는 이상한 음식입니다. 다음 날 아침 메뉴는 선택의 여지 없이 차갑게 식은 그것,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만 달랐습니다. 그 후 깨우친 사실이지만 산에선 이 음식조차 호사스러운 편이었습니다. 육백산은 보리가 자라지 않습니다. 쌀나무는 물론 없습니다. 호밀, 옥수수, 귀리, 메밀, 메조, 감자. 도토리. 대부분 주식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의 시작입니다. 첫 번째 고개는 너무 높아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고갯마루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가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형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고개는 더 높았습니다. 정말 오르기 싫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띄어 놓기 싫을 만치…. "형 이제 얼마나 남았어?" "응~ 쪼끔만 더 오르면 저기 끝이 보이지?" "어디?" 떡갈나무 틈에 보이는 산 정상은 너무도 멀리에 있었습니다. 중간에 서서 울고 싶어졌습니다. 그래도 저기만 오르면 이 고생도 끝이라는 생각에 힘을 얻어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이제 다 왔어? 엄마는 어디 있지?" "아직…. 이제 한 고개만 더 넘으면 된다. 여기서 쉬었다 가자."정말 믿을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던 엄마 집이 가도 가도 나타날 줄 모르고…. 아직도 커다란 고개가 또 하나 버티고 있다는데 그 말을 믿어야 할까요? 마지막 고개는 어떻게 올랐는지 나도 모릅니다. 아마도 눈물 반 콧물 반 흘리다 어느샌가 올랐겠지요.
"이제 정말 다 왔어?" 정말이라는 말에 힘을 잔뜩 주며 물었습니다. “그래 다 왔다. 이 고개를 내려가서 저기 평평한 곳을 지나면 집이 보일 거야.” 내려오는 길은 신이 났습니다. 오를 땐 몰랐는데 길에 밟히는 소나무 갈비가 폭신폭신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쏜살같이 빨리도 뜁니다. "천천히 가라. 넘어진다." 뒤에서 형이 부르는 소리가 멀어져 갑니다. "이런 길이라면 굴러서도 가겠네." 떡갈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신 날이었습니다.
한참 산길을 내려가자 검은 돌이 부서져 군락지를 이룬 곳에 닿았습니다. 유난히 그곳에만 검은 돌이 모여 있다는 것이 신기해졌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내려다보니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두막 한 채가 눈에 들어옵니다. "엄~마. 엄~마." 뒤따라오던 누나랑 형이 합세하여 엄마를 부릅니다. "오이~." 저 멀리 손바닥만 한 마당에 어머니가 나오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이구 기특한 내 새끼.” 맨발로 달려 나오신 어머니는 거북등처럼 갈라진 손으로 연신 내 뺨을 어루만지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 이후 여름 방학을 시작하면 이 산에 올랐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 동안은 아예 이곳에서 살았죠. 그해 늦가을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군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울진 삼척 사태라고 부르는 대규모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살던 집은 국군과 무장공비의 격전지였습니다. 동해를 통해 침투한 간첩이 이 능선을 넘어 내륙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된다 하여 우리는 이 산에 모든 것을 두고 나와야 했습니다. 그 이후 삭막한 철원에서 저의 청소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신, 그동안 꿈꾸었던 몇 가지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 - 철원은 자전거 없이 다니기 힘든 곳입니다 - 서울을 볼 수 있다는 것. 이사를 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