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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tbia 김흥수 Apr 10. 2017

밀림 속의 찬란한 영광,  
앙코르와트 이야기

Angkor Wat

본론보다 긴 서론

프놈바켕에서 본 앙코르 와트 사원 첨팁


웃비아가 앙코르와트를 가보고 싶어 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책 때문이야. 지금은 기억에 희미하지만 처음 책을 본 순간 충격은 잊을 수 없었어. 밀림 속에 불쑥 솟아있는 옥수수 모양의 탑, 커다란 사람의 얼굴 형상이 새겨진 돌무더기,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 500년 동안 밀림에 묻혀있다 극적으로 발견된 도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민족, 운하를 이용한 과학적인 관개수로.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는데…. 이후에도 앙코르와트를 설명한 책은 눈에 뜨이는 대로 읽었거든. 나이가 들면서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심드렁해지고, 예전의 신비감과 흥분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 앙코르와트 방문은 중요한 전기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지.


앙코르 와트 사원 초입


앙코르와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50년이 된 지금. 웃뺘가 방문한 앙코르는 더 이상 밀림이 아니었어. 내전의 상처로 할퀴어진 도로는 아직도 멀기만 하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다듬어진 유적지 일대는 전설 속의 도시가 아니라 유흥가처럼 변해 버렸지. 씨엠립을 도착한 다음 날 앙코르 유적을 방문하는 길에서 본 씨엠립은 나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고 해도 좋아. 이렇게 잘 꾸며지고 현대화된 도시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거든.


앙코르 와트 사원을 들어가며...


각설하고…. 지난 100년간 프랑스 정부와 유네스코가 합작하여 공들여 발굴한 앙코르 유적을 돌아보자고. 가기 전에 앙코르는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대충은 이해해야 할 거야. 발견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앙코르 유적의 규모를 직접 확인해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큰데 이것을 아무 준비 없이 보았다는 것이 문제였거든. 돌아와서 자료를 보고 사진과 대조하며 이곳이 이런 용도였구나 하는 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중요한 부분을 건성으로 지나친 곳이 너무 많았지. (너무 많은 것이 아니고 그저 형상화되어있는 건축물 군상만 보고 온 거야)


타프롬 사원


정말이지 이번 여행에서 웃뺘는 엄청난 돌무더기에 치어 급기야는 너무 크다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했어.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건물이나 조각은 돌무더기에 얼마나 인간이 공을 들였는가 하는 노동력의 척도를 재는 단위로만 보였거든. 힌두신화와 그 당시 생활상을 묘사했다는 부조물은 장식용 무늬로만 보였고 커다란 의미가 담긴 사원과 건물이 어떤 용도로 지어졌는지조차 구별이 안 되었으니 오죽했겠냐고. (우주의 중심을 표현한 와트에서 메루산을 상징한다는 다섯 개의 연꽃 봉우리 형상의 탑이 옥수수 송이로 보였다니까. 흑흑) 남들은 5일도 시간이 모자란다 했는데…. 웃뺘는 지겨워서 인공호수에 수영하러 갔어. ^^


앙코르 지역 물을 관리하던 인공 저수지 웨스트 바라이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유적지를 찾기 전에 약간의 공부는 해야 한다고. 겉만 보고 혀를 내두르고 온 앙코르 기행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보관하고 있던 책과 인터넷 사이트를 뒤졌어. 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처럼 몇 날을 밤새워 자료를 모아 보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연대를 틀리게 기록한 곳이 뜻밖에 많아. 어떤 것이 맞는지 가려내기가 더 어렵군) 학계에 제출할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니 대충 넘어가도 이해하라고. 조금은 알고 가야 앙코르 유적이 조금은 눈에 보일 거라 장담해.


웨스트 바라이 저수지 안의 섬


발견과 보존


지금부터 150년 전. 동남아시아 선교를 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브유보신부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어. 샴족이 사는 밀림 속에서 "죽음의 궁전"을 보았다는 거야. 그 신부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는 밀림 속에 엄청나게 큰 "죽음의 궁전"이 있었데. 입구에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을 거인들이 안고 있는 석상이 줄지어 있고 하늘 높이 솟아있는 연꽃 모양의 탑이 있었다는데…. 프랑스 사람들과 학자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어 버렸지. 브유보 신부가 태국에서 열병에 걸려 헛것을 보았다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1년, 프랑스의 박물학자 앙리무오가 캄보디아 톤레샾 호수 주변을 탐사하다 이 전설 같은 죽음의 궁전을 우연히 발견한 거야. 그 당시는 세계 각국이 미지에 관한 탐사로 들떠있던 시기라 앙리무오의 탐사일기는 세상을 들끓게 했지.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때로는 확대되고 미화되어 신비감까지 조성하며 유명해졌어.


앙코르 톰 성문을 지키는 유해교란 신화 석상들


앙코르와트를 세상에 알린 공은 무오에게 돌아감이 마땅하겠지만 이 전설의 도시가 갑자기 밀림에서 솟아난 것은 아니었어. 알고 보면 브유보 신부처럼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곳을 드나든 방문자가 꾸준히 있었다는 거야. 예전부터 기록에 남아있었지만 그걸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묻혀있었을 뿐이지. 실례로 1296년 중국의 관리 주달관은 황제의 사신으로 앙코르 톰을 다녀온 기록을 "진랍풍토기"라는 책으로 남겼어. 그 기록은 차후 앙코르와트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자료가 되었는데 이 책을 1819년 중국학 연구자 아벨 레뮈사가 번역하여 유럽에서 읽혔으니까 오래전에 이미 알려진 것이잖아. 태국의 각종 기록에도 앙코르와트는 뚜렷이 명시되어 있었고. 현지인들 에게는 신비의 사원으로 전설처럼 남아있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무언가 더 중요한 일에 매달리는 동안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던 셈이지.


프놈바켕 사원에서 본 앙코르 와트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면 이렇게 찬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사람들이 570년 전인 1430년경에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거야.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느 날 아침밥을 먹다 숟가락을 들고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전성기에 앙코르 지역 인구가 100만 명가량 살았다는데…. X파일에 나오는 우주인이 몽땅 데려갔을까? 가장 신빙성 있는 답은 번성하던 앙코르 제국이 13세기 말부터 라오스 쪽 참족에게 시달리며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서쪽의 타이족과 북쪽의 몽골족이 번갈아 가며 못살게 굴었던 것이 앙코르 제국의 멸망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거란 학설이야.


피메나카스 사원 부조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앙코르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정교하게 만든 수로가 파괴되자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어 1430년경 수도를 프놈펜 쪽으로 옮기고 훌쩍 떠날 수밖에…. 그렇더라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지. 왜 이 근처 톤레샾 호수 쪽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500년 동안 이곳을 방문해 보려고 생각지 않았을까? 그렇게 찬란한 문화를 남긴 크메르족이 프놈펜 쪽으로 이주했다면 그 문화가 전수되어야 할 텐데 이 이후에는 그 문명이 사라져 버린 거야. 앙코르 왕국을 세운 크메르왕조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조차 자기의 역사를 앙코르와트가 발견되기 전 500년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냐고?


반테스라이


에니 웨이…. 브유보 신부가 본 전설 속의 궁전은 우리가 앙코르와트라고 부르는 사원이었을 거야. 발굴하는 과정에서 앙코르와트는 궁전이 아니라 사원이라는 것이 밝혀졌거든. 이 사원은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이 밀림 속 유적을 압도하기 때문에 앙코르와트라는 대명사로 불리지만 실제 이 지역을 앙코르(도시)라 부르고 유명한 와트(사원)와 톰(큰, 크다)이 이 안에 포함되어있다고 이해해야 해. 앙코르라는 이름은 산스크리스트어인 ‘나가라’(나라 또는 도읍을 뜻함)가 캄보디아 사투리로 ‘노코르(Nokhor)’라 불리다가 이것이 다시 앙코르로 변했데. 와트는 "사원"을 뜻하는 말이고. 톰은 "크다"는 말이니까 이 명칭이 이해되겠지?



처음 발견될 당시에는 밀림이 너무 우거져서 높이 솟은 탑이 보이는 앙코르와트 쪽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밀림을 뚫고 발굴을 시작하자 앙코르와트는 아주 큰 도시의 한쪽에 있는 사원이라는 것이 밝혀졌지. 앙코르와트가 발견될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태국의 영토로 남아 있었어. 1907년에 와서야 태국이 캄보디아에게 예전에 침공한 땅을 돌려주었거든. 프랑스 정부는 앙리무오가 이 사원을 발견할 당시 동남아시아(특히 월남 쪽)를 식민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손을 뻗친 타이 지역은 프랑스 통치지역이 아니지만, 꾸준히 공을 들이며 발굴 작업을 했지. 밀림을 깎아내고 청소를 하고…. 무너진 돌무더기를 해체하여 다시 복원하고.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 식민지가 된 1907년 가을 3개월 동안 2,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다는데 그 당시 교통 사정을 짐작해 보아 대단한 인기를 누린 것이 분명해.



그 후 프랑스 정부는 앙코르와트의 복원과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베트남 '디엔비에프'전투에서 패배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하게 되자 1960년대에 시작된 고고학 탐사작업이 정치적인 관계로 자주 중단되고 방치되어 앙코르는 다시 황폐화하기 시작했어. 1970년대부터는 베트남 전쟁과 캄보디아 내전에 휩싸이면서 더 큰 홍역을 치렀지. 전쟁이 끝난 1992년, 앙코르 지역을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현재는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으로 특별 관리를 하며 부분적으로 계속 복원이 되고 있어.


워낙 방대한 지역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어서 이걸 다 복원한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라.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앙코르와트의 전성기 시절을 유추해 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 하지만 웃뺘가 삼 일간 이 지역을 돌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사진을 보며 짐작하던 그렇게 만만한 크기가 아니었거든.


바푸온 인면상


진랍풍토기에서 주달관이 직접 보고 목격한 화려함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 아쉽게도 앙코르 지역의 유적들이 풍화 작용에 약한 사암으로 만들어져 대부분 건물과 조각들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식되었어. 특히 수로를 감싸고 이루어진 앙코르 유적들은 지형과 기후 때문에 밀림이 형성되어 식물과 세균에 의한 침식과 풍화가 가속되어 옛 자취를 그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쉬워. 타임머신이 있다면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가 영화를 누리던 그 시절의 앙코르 톰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을 뿐이지.


요즘 유행하는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하여 이곳을 옛날 모습 그대로 재현을 해 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어. 몇 년 전 영국 BBC에서 만든 공룡의 기원처럼 모든 자료를 입력하여 이 당시의 모습을 대형 화면에 재현한다면 정말 압권일 거란 생각이….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기술은 또 하나의 앙코르와트가 아닐까?


바이욘의 인명상 일부 (포토샾 작업)


이해를 돕기 위해


앙코르가 발견되고 나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크메르족의 역사가 밝혀진 것이지. 이 역사가 어떻게 밝혀졌을까? 그 열쇠는 이곳의 모든 건축물이 그들의 건국 신화와 역사를 사실적이고 예술적인 부조로 표현해 놓았기 때문이래. 이끼가 끼고 나무뿌리에 휘감겨 파괴되긴 하였지만, 이 독특한 기록 형태 덕분에 1000년이 지난 이후에도 정확히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경이롭지 않니? 


고대 이집트나 우리나라 경우처럼 사후 시신을 매장하는 문화는 시신과 함께 유물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타임캡슐을 개봉하듯 그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크메르족은 화장 문화여서 이런 기록의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앙코르의 역사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었을지도 몰라. 이런 이유로 앙코르 유적을 돌아볼 때는 이곳의 조각과 부조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두는 것이 그곳을 이해하는데 최고의 열쇠가 되는 셈이지.


앙코르 톰 유적에 세겨진 선명한 부조


웃뺘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책을 다시 보며 그 당시를 회상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어. 조금만 더 알고 갔더라면 하고 후회를 해본들 어쩌겠어? 메루산, 비쉬누, 바라문, 유해교란 (우유의 바다 젖기). 이런 말 들어 봤니? 이런 것도 모르고 간다면 밀림 속의 영광이라는 앙코르와트는 그저 웅장한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아. 짧지만 몇 가지는 알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앙코르 톰 유적에 세겨진 선명한 부조


◈ 앙코르(Angkor)란?

앙코르(Angkor)라는 이름은 산스크리스트어인 ‘나가라’(나라 또는 도읍을 뜻함)가 캄보디아 사투리로 ‘노코르(Nokhor)’라 불리다가 이것이 다시 앙코르로 변했데. 왕이 살던 도시나 나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할 거야. 줄인다면 "왕의 도읍". 앙코르와트(Angkor Wat)의 와트(wat)는 사원이라는 뜻이니 앙코르와트는 "왕의 도시에 있는 사원"이고 톰(Thom)은 "크다" "큰"의 뜻으로 쓰이므로 앙코르톰(Angkor Thom)은 "커다란 왕의 도시"야. 그렇다면 극장에서 재청이란 뜻으로 앙코르라고 외치는데 이게 캄보디아 앙코르와 연관이 있을까? 있다는군.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앙코르를 방문한 군인들이 앙코르를 보고 감탄하여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뜻에서 앙코르 앙코르하고 외쳤는데 이게 굳어져서 앙코르란 말이 태어났데. (확인 불가)


앙코르 와트 사원


◈ 앙코르 유적을 돌아보면 와트보다 다른 부분이 더 큰데 왜 이 지역을 통틀어 앙코르와트라고 부를까?

앙코르 지역에서 와트가 가장 뛰어난 장관을 연출하므로 대명사처럼 불릴 뿐이지. 실제로 가보면 앙코르톰이라 불리는 도성의 유적이 이보다 더 크고 넓은 지역에 있다는 걸 알 거야. 앙코르 지역에는 앙코르와트를 제외한 수많은 사원이 있으니 이렇게 부르는 것은 틀린 말일 거라 생각해. 


◈ 앙코르의 신앙 바라문교와 힌두교.

힌두교는 인도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샤머니즘이나 토템이즘을 종합하고 체계화한 종교야. 바라문의 교리와 베다스 성전의 전통적 신앙 교리 사이에서 힌두교가 탄생하여 힌두교도들은 바라문이라는 우주의 사상을 믿지. 이들이 믿는 신은 지구상의 인간의 숫자만큼 많다고도 비유를 하는데…. 대표적인 신으로는 시바(Shiva), 비슈누(Visnu), 브라마(Brahma), 인드라(Indra)등 정말 많아. 바라문교는 기원전 9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아리안족에 의해 인도에 건너온 종교라는데 주술에 의해 신비한 힘이 나오고 형상과 만물에 영혼이 있어서 삶과 죽음이 끝없는 윤회 한다고 믿는 종교야. 이 바라문교는 우주의 중심축이 메루(Meru)산이라는 고대의 우주론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앙코르와트는 이 교리를 그대로 적용해 사원을 지었대. 이걸 알고 앙코르와트 사원을 돌아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앙코르 와트 사원 벽면 회랑에 세겨진 "유해교란" 신화 일부


◈ 앙코르 와트의 힌두 신화 - "유해교란" (우유의 바다 휘젓기)

"유해교란"이란 고대 힌두의 2대 대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라타"에서 나온 이야기 중의 일부로 비슈누신과 아수라라는 악마들이 싸움을 그린 신화야.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불로장생약을 만들기 위해 약초를 바다에 넣고 만다라 산을 막대기로, 밧줄은 거대한 뱀 바스키를 사용하여 바다를 저었다는데 이 과정에서 압사라(춤추는 선녀)와 사랑의 신 락슈미가 태어나고 마지막에는 죽지 않는 약 아무리타가 나왔다는 거야. 앙코르와트 동쪽 회랑과 앙코르톰 성문에 이 신화가 부조와 조각상으로 표현되어 있지. (웃뺘는 그걸 보면서도 무슨 뜻인지 몰랐어. 흑흑) 이외에도 많은 신화가 부조로 표현되어 앙코르 사람들이 믿던 종교와 신화를 추정할 수 있었데. 


앙코르 톰 코끼리 테라스


◈ 앙코르 유적에는 왜 힌두교와 불교 유적이 한꺼번에 존재할까?

앙코르의 유적은 초기에는 힌두교의 바탕에서 건립되었지만 말기에 불교를 숭상하면서 두 개의 종교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이지. 인도나 네팔을 돌면서 느낀 점이라면 전혀 다른 종교로 인식했던 불교가 힌두교 문화의 바탕에서 나온 종교라는 거야. 이건 참 의외였는데 힌두교의 많은 신중에 석가모니가 포함되어 있더라고. 


앙코르 와트 사원 입구의 뱀 신 나가의 상 (뒷 부분)


◈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 신 "나가" 

앙코르 유적지의 돌다리 난간은 어김없이 7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 형상이 조각되어있어. 이 뱀은 힌두 신화에서 7대양을 상징한다고 하며 캄보디아의 건국신화에 최초로 등장하는 왕이기도 해. 이 뱀신 나가왕의 딸 소마공주와 서쪽의 먼 나라 아리아 데카국에서 온 칸브 왕자가 결혼하여 칸브자 (칸브의 아들)가 탄생하고 이들이 캄보디안의 시조라고 하지.

반테스 레이 사원의 정교한 조각


숫자로 본 앙코르


역사나 유적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앙코르를 방문한다 해도 눈에 보이는 규모 때문에 압도를 당할 거야.


숫자상으로는 잘 짐작이 안가겠지만, 이 유적의 넓이는 약 20㎢. 

지금까지 발견된 사원은 292개소. 

1908년 이 지역에 앙코르 유적보존 관리사무소를 세웠던 프랑스 고고학자 조르주 그로슬리에는 "평생을 봐도 앙코르를 다 볼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해. 우선 생각나는 것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돌을 옮겨왔을까 하는 의문이고, 두 번째는 이 돌을 쌓고 다듬은 인간의 힘에 놀라게 되지. 

그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일 석조 건물이라는 앙코르와트는…. 2만 5천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37년에 거처 완공. 

그렇다면 연인원이 얼마나 되지? 25,000명 * 연평균 일한 날 추정 300일 * 37년 = 277,500,000 (엄청난 숫자 군) 

이 건물의 크기는 5개의 탑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 담의 넓이가 가로 1.3km, 세로 1.5km. 

그 주위를 둘러싼 인공운하의 폭은 200m. 길이는 5.5km. 

와트의 건물은 피라미드형 삼 층 구조로 1층의 회랑의 길이가 800m.

삼 층 중앙탑의 높이는 67m. 

옥수수 모양의 탑 (어떤 사람은 파인애플 모양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실제는 연꽃 봉우리 모양임) 높이가 60m가 넘는다면 20층 아파트보다 분명히 높을 텐데 워낙 주변 건물의 규모가 커서 이 높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면 이해가 될까?

이곳을 짓기 위해 사용된 돌기둥은 1,800여 개. 

기둥 한 개당 평균 무게는 7톤. 그렇다면 기둥을 제외한 다른 곳에 들어간 돌의 양은 얼마나 되지?

이 숫자로는 어떤 규모인지 짐작이 안 되겠지? 들리는 말에 의하면 현대의 기술과 장비로 이 사원을 지으려면 100년이 넘게 걸린다고 하더군. 이런 말을 들으면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듯하지만, 옛사람들이 토목건축에 들인 공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앙코르와트에서 1.5km 떨어져 있는 앙코르 톰의 규모는? 

두말하면 잔소리. 앙코르와트보다 훨씬 커. 

정사각형 모양의 도성에 동으로 2개, 서, 남, 북 방향으로 각 1개의 거대한 대문. 

성벽의 한 변의 길이는 3km. 총 길이는 3 * 4 = 12Km. 

성벽의 평균 높이는 8m. 라테라이트라는 붉은 흙으로 싸여있고. 

이 성벽을 둘러싸며 너비 100m의 수로가 형성됨. 

이 도성 주변으로 전성기에 살았던 인구수는 100만 이상. 

성의 중심부에 있는 바이욘 사원의 인면탑 (부처의 얼굴형상 탑)은 54개. 

모두 다 사면으로 얼굴을 조각하였으니 자비로운 얼굴의 숫자는 216개. 


앙코르 유적,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 개념도


이런 숫자로 무얼 짐작할 수가 있지? 

암튼…. 고대 로마 제국을 이곳에 넣고도 남을 규모래.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 유적을 제외하고도 사방에 많은 사원이 발굴되어 이 근처를 건성으로 돌아보더라도 삼일은 족히 걸리는 규모라고 이해하면 돼. 이외에도 크메르족이 남긴 유적은 밀림 곳곳에 있어 앙코르 유적을 꼼꼼히 볼 생각이라면 장기 체류를 해야 할 거야. 


참…. 앙코르 제국이 번성하게 된 동기가 뭔지 알지? 

인공 저수지를 건설하여 과학적인 치수관리를 하였기 때문이야.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영토가 정교한 수로와 만나 삼모작이 가능했다는군. 바라이(Baray)라 부르는 인공 저수지의 규모는 옛사람들이 팠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규모였어. 앙코르톰 서쪽에 있는 웨스트 바라이는 절반쯤 흙에 묻혀 있지만, 아직도 물을 저장하고 있고 동쪽 바라이는 토사에 묻혀 정글로 변해 버렸지. 

도성 밖에 있는 아름다운 왕의 풀장(스라스랑 Srah Srang)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서 동내 아이들이 목욕하며 놀던데…. 그곳의 규모는 700m X 300m. 이렇게 거창한 풀장에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는 기분이 어땠을까? 이곳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일 거라 생각해. 


앙코르 와트 사원의 "압살라"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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