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피소드
맛배기 트레킹을 준비했다.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4봉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여 진을 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험한 산길 주행이 가능한 랜드 크루저를 7,000루피에 랜트, 뒷자리에 짐을 싣자 앉을 자리가 부족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무슨 걱정. 이곳은 네팔이다. 정원 초과를 따질 교통경찰도 없거니와 한국에서 꿈도 못 꿀 특석이 마련되어있지 않은가. 올리브와 나는 냉큼 지붕 위 퍼스트 클래스로 올라갔다…. 카카
페디까지 이동하는 동안은 길이 포장되어 룰루랄라 노래가 나왔지만, 그 이후는 일등석이 좀 거시기 하다. 사나이 체면에 엉덩이 아파 못 타겠다는 말도 못 꺼내고,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산길을 달리자니 죽을 맛이다. 그래도 재미는 있도다. 몽골에서 말 타던 재미를 이곳에서 또 한 번 누렸다. 이번 여행 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담프스 트레킹이었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 이유는 바로 준비되지 않은 여행의 변수 때문이다. 지금부터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변수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정말 깨끗한 사쿠라 산장을 뒤로하고 트레킹을 시작하자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칠 것 같던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그래도 신나게 떠들며 산 중턱으로 이동. 눈앞에 나타난 체크 포인트! 입산료 30불. “거네스 이게 우짜 된 일인감? 잠깐 저 위 산장 가는데 30불이나 달래?” 4개월 전 체크포인트가 생긴 것을 거네스도 몰랐다고 난감해 한다. 음냐리~~ 가서 사정 좀 해 봐라…. 어쩌고저쩌고 저쩌고 어쩌고 아무튼 우리는 내일 아침에 내려오는 조건으로 영수증 없이 15불씩 바쳤다.
한두 시간 올랐을까? 중간에 나타난 작은 산장에서 음료수 한잔 마시면서 발을 내려다보니 무언가 껄쩍 지근…. 헉! 거머리가 다리에 붙어 통통하게 피를 빨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
우기 트레킹 때 거머리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그건 남의 일만 같고, 간단히 등산하는데 어쩌랴 싶었다. 소 등에 잔뜩 달라붙은 거머리가 살이 통통하게 쪄서 저렇게 큰놈이 달라붙으면 바로 눈치챌 수 있으려니 걱정도 않았다. 전엔 건기에 트레킹을 했기 때문에 거머리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사진설명 :
좌로부터 1. 소등에 붙은 거머리 2. 자벌레 같은 거머리 3. 옷에도 붙어있고....
4. 시곗줄 속에서도 유유히 피를 빨고 5. 다리에 붙어있고... 6. 거네쉬 배에도...-!-
7. 주머니 속 담뱃갑에도.. 8. 신발에서 나온 거머리들 (소금에 놓으면 쪼그라듬) 9. 신발 홈에 붙어있는 거머리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자 손에 척 옮겨붙는다. 털어도 안 떨어지고 하는 수 없이 발로 밟아버렸지만 계속 꿈틀댄다. 고얀 놈. 옆에 있던 메가솔이 셔츠를 들치자 배꼽 옆에 흉측한 놈이 떡 하고 붙어서 피를 빤다. 으이그 징그러워….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실처럼 가늘고 작은 거머리가 수없이 옷에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남자들이야 조금 징그러워도 처리를 하는데 왕언니가 아예 패닉 상태에 돌입했다. 이걸 어쩌나…. 이러다 혼절을 할까 더 겁이 났다. 괜찮다고 달래면서 옷에 붙은 거머리를 몰래 떼어내어 발로 밟아버렸다. 내 신발은 구멍이 뚫려 있어 완전히 거머리 집이 되어있었지만, 꾹 참고 털어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왕언니에겐 이상하게 없네요.” (없긴 뭐가 없어…. 신발에도 옷에도 온통 거머리 판이구먼…. 컥컥)
네팔의 거머리는 해발 1,500~2,500m 정도의 열대 우림 지에서 가장 많이 서식한다. 우기, 특히 비가 오는 날과 밤에 왕성한 활동을 한다고 한다. 네팔의 거머리는 몸을 수축하여 아주 작은 틈새도 통과하며 물이 아닌 나무나 풀에 붙어 있다가 동물에게 달라붙는다. 거머리가 피를 빨 때 마취 성분과 혈액 응고 방지 성분을 함께 주사하여 아프거나 가려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꿈틀거리는 느낌과 물컹한 느낌이 전해져 왠지 온몸이 스멀거리는데 특별히 징그럽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가려운 모기보다 거머리에 물리는 편이 차라리 나은 것 같다. 요즘은 거머리 혈액응고방지 성분을 이용한 치료법도 개발되었다니 약간의 헌혈쯤은 눈감아 주고 우기 트레킹에 도전해 보자…. 카카
참으로 이상한 장소에서 자매들의 정을 본다. 혼절 직전의 언니가 조금 살아난 이후에는 뒤 따라 오는 동생 걱정을 시작한다. “버들이는 나보다 벌레를 더 무서워하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발을 동동 구르며 걸음을 옮길 생각을 않는다. 짐을 챙기느라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간 버들님과 올리브는 분명히 지름길로 올 테니 어여 가자고 졸라도 꼼짝 마라다. 하는 수 없이 메가솔과 거네스에게 언니를 맡기고 나 혼자 산장을 향해 출발했다. 어스름할 무렵 도착한 산장엔 예상대로 버들님과 올리브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다음 일은 안 봐도 답 나온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머리 생각은 아예 잊고 미나리꽝에서 “나 잡아 봐라”하고 사진을 찍으며 난리 브루스를 췄다니 답은 딱 하나다. 버들꿈틀님의 사망!!! 그리고 부활…. 그다음은 혼절~.
두 자매의 상봉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비명과 탄식과 끔찍한 여행을 따라나선 자괴의 한숨. 그리고 자리에 앉지조차 못하는 두려움의 연속…. 산장까지 안내를 맡은 사쿠라 카페 직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에 넋을 반쯤 잃어버렸다. 장난꾼 거네스도 똥그란 눈알을 굴리며 상황을 부추긴다.
비 오는 산장의 어스름한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싸구려 보드카에 마음을 덥히고, 레썸 필리리 노래에 맞추어 산장의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주거니 받거니 어느 순간 우리의 호프 올리브는 초특급 코미디언으로 변신했다. 말 안 통하는 산장 주인과 아주머니도 너무 재미있어 배꼽을 잡고…. 이 시간 이후 올리브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상한 콩글리시를 네팔 땅에 대유행시켰다는 전설이….
산장의 밤이 깊어가고 잠자리에 들 시간. 잠깐 세수를 하고 들어왔더니 침실이 울리도록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메가솔이 옆방에서 떨어졌다. 몇 분 후 올리브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듀엣. 또 얼마 후, 거네스가 들어와 트리오로 화음을 보탠다. 그다음은 나도 모른다. 밤새 거머리의 환영에 시달려 한숨 못 잔 왕언니의 말에 따르면 쿼르테를 듣느라고 황홀했다나 어쨌다나…. 이렇게 방음이 잘 되는 산장엔 신혼부부를 데려와야 제격인데….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