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 [비포 선 라이즈]와 [비포 선 셋]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 1995
비포 선셋 Before Sunset , 2004
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 출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부다페스트발 뮌헨행 열차” 미국 청년 에단 호크는 여자 친구에게 딱지를 맡고 가장 싼 비행기가 출발하는 비엔나로, 소르본느 대학생 쥴리 델피는 방학 중 헝가리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갔다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미국 청년과 프랑스 처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일상에서 벗어나면 사람은 평소에 느끼지 못한 감정이 살아나고, 이따금 비정상적인 행동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간혹, 내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가 없어졌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유로움이 주는 관대함을 만끽하고 싶어지죠. 에단 호크와 쥴리 델피는 바로 이런 상태에서 만나 몇 마디 주고받은 말 속에서 지금껏 꿈꾸어 오던 이상형을 한눈에 발견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돌아가야 할 집이 있고, 15시간은 서로를 확인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순간 진정 사랑한 것이라면 6개월 후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그리고 영화 “비포 선 라이즈”는 끝이 납니다.
그 후 9년,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파리에서 80분간 리얼타임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바로 “비포 선 셋”입니다. (제목이 참 기가 막힙니다. 선 라이즈와 선 셋^^) 제 기대와 달리 둘은 6개월 후 재회를 하지 못했더군요. (그랬다면 선 셋이 안 나왔겠지만) 에단 호크는 6개월 후 아버지에게 비행기 삵을 빌려 정확하게 그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나 쥴리 델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허탈하게 미국으로 돌아간 에단 호크는 결혼식장을 가는 길에서도 쥴리 델피를 잊지 못합니다. 작가가 된 에단 호크는 이 이야기를 그대로 책으로 썼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파리에서 출판 기념회를 여는 날 쥴리 델피가 사인회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에단 호크가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70분간의 시간을 리얼타임으로 영화에 담았습니다. 1편은 15시간의 이야기를 100분에 담았기 때문에 비엔나의 모습을 아기자기하게 보여 주는 반면 2편은 노트르담 사원이 있는 시테섬 옆 책방과 골목, 그 주변 찻집, 바토뮤슈라는 유람선 10분 탄 것이 답니다. 이 장소들이 너무 눈에 익어서 좋긴 했지만….
저는 유럽 여행을 하기 전해 "비포 선 라이즈"를 봤습니다. 비엔나에서 커다란 원형 관람차를 보며 이 두 사람을 생각했었죠. 케롤 리드의 명작 "제3의 사나이"에 나온 그 관람차도 바로 이것이었을 겁니다. 트램을 타고도 쥴리 델피를 떠올렸으니 여행에서 영화가 미치는 영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재미있다고 무작정 추천해 줄 수는 없습니다. "비포 선 라이즈"를 재미있게 보신 분이라면 당연히 후편을 보셔야 하고 잔잔한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도 후회 없으리라 장담합니다. 커다란 사건이나 반전은 없어도 은근히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감독은 처음 영화를 만들 때부터 후속편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미련이 아직도 남아서 “비포 선 셋“에서도 마지막 장면은 또다시 독자의 상상으로…. 아마 5년 후엔 "비포 애프터 눈"이, 10년 후엔 "비포 미드나잇"이 나오지 않을는지….
** 헐~ 정말 제 예언대로 11년 후 2013년에 "비포 미드나잇"이 나왔습니다. -이런 통찰력이…. 카카 **
여행을 떠나시는 분들, 특히 유럽여행을 준비하신다면 "비포 선 라이즈“는 꼭 보고 가세요. "비포 선 셋"은 흔들리는 중년 분들에게 아주 좋습니다. "비포 선 셋"은 여행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아주 잘 그려 놓았습니다. 짧은 시간 서로의 마음속을 꿰뚫어 봐야 하는 상황이라 가끔은 진실을 농담처럼, 거짓을 진실처럼 말합니다. 작은 몸짓과 표정에서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20대의 싱싱한 쥴리 델피가 30대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것도 확인하시고.
저가 “비포 선 셋”에서 크게 공감하는 이유는 시작 부분에서 에단 호크의 인터뷰 부분과 그 상황 때문입니다. 기자가 질문하죠. "네가 쓴 이야기가 진실이냐?" 에단 호크가 말합니다. "사람은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토마스 울프의 소설 '천사여 고향을 보라'에서 모든 인간은 각자 쌓은 체험의 총체이며 작가는 자신이 겪은 그런 체험을 글로 적을 뿐이라고 말했다. 내가 살아온 삶은 평범했기에 총이나, 폭력, 정치 음모나 헬기 사고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모든 삶은 드라마다. 난 삶 속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글을 쓰고 싶었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만남의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의 소중함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했다."
어쩌면 “비포 선 셋”의 작가는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장면에서 머릿속을 총알이 꿰뚫고 간 느낌이었습니다. 여행, 만남, 인연…. 저에게는 영원한 숙제 같은 주제입니다. 그리고 길을 나설 때 막연하게 드는 그 기대감. 누구든 꿈을 꿀 겁니다. 알 수 없는 곳에서 하룻밤의 로맨스를…. 여행의 묘미가 바로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질문이 들어오는군요.
“넌 그런 로맨스가 있느냐?”
글쎄요…….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스”라고 했다간 다음 여행준비를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생기거든요.
저는 도덕 시간에 졸아 본 기억은 없지만 그렇다고 수도승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