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만남 5
런던에서 출발한 에든버러행 심야 버스에서 내릴 때 키 작고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노트를 내밀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이 적어 놓은 방명록…. 한국인을 한눈에 알아본 아저씨의 통찰력에 놀라며 글을 훑어보았습니다. "믿고 따라가도 후회가 안 될 민박집"이라는 칭찬이 쓰여 있더군요. 안 그래도 민박을 작정한 터라 망설일 이유 없이 O.K 했죠. “저스트 모멘트~.” 10분쯤 길에 서 있었더니 그날 이 집에 함께 묵게 될 4명의 외국 아가씨를 태운 소형차를 끌고 왔습니다.
고든씨는 두 채의 집을 갖고 있더군요. 한 곳은 여자, 한 곳은 남자를 묵게 합니다. 짐을 풀자 중국 라면과 오트밀, 홍차를 차려 놓고 불렀습니다. 야간 버스에 시달린 속을 해장국보다 더 고맙게 달랬습니다. 잠시 후, 시내 투어를 시켜 준다고 차를 타라고 했습니다. 우선 칼튼힐에 올라 에든버러 시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걸어서 가기에는 무리인 몇 곳을 돌고, 점심 무렵 에든버러 성 앞에 도착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을 지도에 꼼꼼히 표시해 준 다음 고든씨는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에 숙박비를 드리려는데 정해진 가격 없이 마음대로 주라고 했습니다. 이럴 땐 참 난감합니다. “얼마를 드려야 하나?” 앞사람들이 써놓은 방명록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유스가격과 민박요금이 대개 10파운드쯤이라며 그 정도면 된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고마워서 10파운드와 볼펜 Set, 열쇠고리를 함께 드렸습니다.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흐뭇했고요.
다음 날 아침 일찍 Mr.고든은 잠에서 덜 깬 나를 차에 타라고 재촉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그냥 따라나섰지요. 어제 아침처럼 사람들을 픽업한 다음 차를 에든버러 성당 앞에 세우고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 내가 가톨릭이라고 했더니 그걸 기억하고 미사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해 준겁니다. 숀 코넬리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것도 기억하고 숀 코넬리가 다니던 학교를 지날 때마다 알려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네스호 투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고든씨는 우리의 -그 집에 묵었던 사람들- 짐을 차에 싣고 투어 버스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런던행 버스가 출발하는 곳에 내려 준 다음 돌아갔습니다. 이 분의 작은 친절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민간외교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만하답니다. 덕분에 스코틀랜드는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작년 봄 에든버러를 다시 갈 때 이때의 기억이 새로워서 인터넷을 뒤져보았습니다. Mr.고든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이 일을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여행자가 쓴 고든에 대한 기록이 최근까지 올라와 있었고 사진에 보이는 고든의 집도 그대로였습니다. 다행스럽게 전화번호가 있어서 고든을 기쁘게 해줄 작은 선물도 싸들고 갔습니다. 고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옛날 친절을 기억해 주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에든버러에서 몇 차례 시도했지만 고든과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해드리지 못한 선물은 이번에 친절을 베풀어준 백스터 호스텔 종업원에게 대신 주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