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 사랑하는 이에게
비엔나 97. 5. 02
음악의 도시 비엔나다.
슈테판 성당에 앉아 글을 쓴다.
국립극장 투어도 하고, 모차르트 음악 감상회도 갔었다.
꿈에 그리던 일들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그만큼 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만 는다.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다음 기회란 게 있기나 할까?
이런 호사가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빈다.
당신 말대로 앞으로는 집 걱정 덜어 놓고 여행에 임할게.
아무쪼록 온 식구와 직원들의 안녕을 빈다.
잘츠부르크 97. 5. 04
여행 중 처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모든 언어가 독일어라 안내판 보는 일이 힘들지만
어차피 눈치코치로 이해하고 그림 표시판으로 해독한다.
문맹이 얼마나 답답할지 이해가 가는 여행이다.
몇 자 배우지 못한 영어를 만나면 왜 이리 반가운지….
여행객들이 영어를 잘하여 그나마 도움이 된다.
이곳 잘츠부르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진 곳이다.
기대를 했었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일 거란 짐작을 못 했다.
일정을 바꿔 여정을 하루 더 늘렸다.
유스호스텔도 좋고, 아침 식사도 훌륭하다.
어제저녁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끌려 들른 성당에서 영성체를 모시고 신부님과 수녀님께 인사도 드렸다.
오늘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너무 부지런을 떨었더니 관광지의 문을 열지 않아 미라벨 정원에 앉아 한가로움을 즐겼다.
모차르트 생가 앞을 서성대다 헬브룬으로 이동하여 분수와 정원,
동물원을 돌아보았는데 벌써 다리가 아프구나.
지금 타고 있는 열차는 시골 냄새가 풀풀 나서 정이 간다.
할라인이라는 마을로 가서 암염 광산을 둘러볼 예정이고.
이곳을 그려보려면 "사운드 오브 뮤직"을 생각하면 된다.
영화보다 실제 이곳에 있다는 것이 더욱 감동적이고 멋있긴 하지만.
영화는 이곳의 공기와 자연의 소리는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15분 단위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와 짤자흐 강을 흐르는 물소리는 바로 음악이다.
모차르트 같은 신동이 태어날 만도 하구나.
내일은 쟝크트 볼프강으로 가서 티롤 알프스의 전경을 보려 한다.
당신을 데려온다면 잘츠부르크와 에든버러 부다페스트를 보여주고 싶다.
물론 다른 곳도 기대에 못 미치는 곳 없이 훌륭하지만 특히 좋았다.
여행 중 느낀 점은 유럽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무척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잘츠부르크 97. 5. 04
"짤즈베르베크"라는 소금 광산을 다녀와서 유스에서 파는 저녁 식사를 신청했다.
10 오스트리아 실링 이면 우리 돈으로 5,600원 정도인데 이곳 물가로는 싼 저녁 식사에 속한다.
종업원이 예약이 끝났는데 저녁을 구해 주선해주었다.
모처럼 포식을 했다. 비싼 돈을 주고 먹을 때는 아무리 맛있어도 뒤가 씁쓸했거든.
식사 후 샤워를 마치고 유스 밖 벤치에 앉아 당신과 집 생각하며 여유를 부린다.
지금 시간이 저녁 8시 반, 아직도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밝다.
야경을 보려면 10시는 넘어야 한다. 참 이상한 곳이지?
조금 전, 자동 세탁기가 거금 1,600원을 꿀꺽하여 배가 아프다.
먼저 동전을 넣었더니 이놈이 뱉을 줄 모른다.
망할 놈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건조기에 당했는데….
이렇게 배우고, 아쉬우니 공부하고,
자동 기계 앞에 서면 못 읽는 독일어라도 꼼꼼히 보고 다닌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할지 모르지만, 이 여행이 끝나고 당신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면 정말 잘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너무 잘 있으니 걱정 말고,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잘츠부르크, Schafberg 97. 5. 05
영남에게,
자주 소식 주지 못해 미안하다.
짧은 일정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느라 강행군하고 있어 글 쓸 틈이 없었다.
하지만 숲 속을 걸을 때나 눈 덮인 산을 보면 너 생각부터 난다.
오늘은 오스트리아의 꽃이라는 티롤 알프스의 끝자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짤즈캄머구트를 찾았다.
지금껏 이렇게 자연이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남아 있는 곳을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구나.
너무 깨끗하고 너무 아름다우며 너무도 평화롭다.
잘츠부르크에서 포스트 버스를 타고 1시간 동안 티롤의 숲 속을 달려와,
커다란 유람선을 타고 바닥이 보일 듯 푸른 볼프강 호수를 1시간 가로지르면 쟝크트 볼프강이라는 아주 작고 귀여운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바로 등산 열차를 갈아타면 단숨에 해발 1,000m 이상을 올라 눈 덮인 산 중턱에 내려놓지.
그곳에서 관광객들은 돌아내려갔지만, 큰마음먹고 정상을 향해 올라왔다.
해발 1,783m라는 표지판이 있다.
지리산 천왕봉보다 더 낮은데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호수가 바로 내려다보여 고도 감이 엄청나다.
이곳은 날씨가 따뜻한데 눈이 녹지 않는다.
바람도 차지 않고 햇살은 정말 눈이 부시다.
내가 유럽을 도는 동안 이곳에 기상이변이 일고 있다.
이렇게 화창한 적이 없었다는군.
지금껏 쾰른 대성당에서 잠깐 비를 피한 것 외에는 정말 여행하기 좋은 날씨였다.
눈 덮인 산군을 바라보며, 잔설이 남아있는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서서 땀에 젖은 옷을 몽땅 벗어 버렸다.
알프스의 산들바람이 온몸을 감싸도록 내버려두었지.
산을 내려오는 것이 오히려 죄스러워 계속 고개를 돌렸다.
뮌 헨 97. 5. 06
명구에게….
미아가 되지 않고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니?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러울 만큼 잘 처신하고 마음껏 친구를 사귀고 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난 아마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될지도 몰라.
콧대 높은 프랑스 아이 버릇을 고쳐놓고,
신참 여차장과 악을 쓰며 싸우고,
일본인과 한일관계를 논하며 우리의 국토 통일을 염원하고,
독일 아이와 어깨동무하고 맥주 마시고,
네덜란드 할머니와 밤새도록 얘기하며 펜팔 약속하고,
엊그제는 헝가리 교민을 만나 씨에로를 타고 나체촌을 돌았다.
벌써 유럽을 도는 한국 배낭 여행객들에게 내 소문이 퍼져서 –여행지마다 만나니까-
뮌헨 역에서는 웃지 못할, 아니 웃기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의 일정은 모두 끝났다.
이제 다시 뮌헨으로 돌아가 시내 관광을 하고 베네치아행 야간열차를 탈 예정이다.
아무쪼록 남은 동안 양쪽 가게 열심히 돌봐주고
특히 형수 신경 써줄 것 또 한 번 당부한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끝맺는다. Have a nice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