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 사랑하는 이에게
베네치아 97. 5. 07
브르헤의 관광 안내소에서 북구의 베네치아라는 비교 소개 글을 보았다.
운하를 끼고 있는 모든 도시가 자랑처럼 어디 어디의 베네치아라고 베네치아를 닮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정작 베네치아는 비교를 거부하는 독보적인 도시이다.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갑자기 기차가 물 위를 달린다.
여행을 떠나기 전 너무 많이 알고 가면 실망감이 앞선다는데 기대치를 낮추어서일까 아직껏 실망한 곳이 없었다.
베네치아는 상상했던 것보다 물이 깨끗하고 클 뿐 아니라 정말 재미있는 도시다.
사실 관광한 시간보다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완전히 미로인데 한번 지나온 길을 다시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유리 공예품과 마스크, 기념품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렵게 리알토 다리를 건너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유럽의 모든 건축물이 워낙 거대하여 이제는 큰 건물을 마주하면 당연하게 느끼는 둔감증이 오기 시작했다.
내일 로마를 가면 어떤 기분일까?
전화 목소리가 힘없이 들려 무척 마음에 걸린다.
부디 돌아갈 때까지 힘든 일 일어나지 않기 바라….
4.5월은 비수기이니 장사가 안 되는 것은 감수하고 몸이나 편하길 빈다.
날이 갈수록 미안한 마음만 커진다.
잘 자……. 나도 내일을 위해 자두어야겠다.
바티칸 97. 5. 09
성 베드로 성당에 도착했다.
엄청나게 큰 성당 돔에 올라와 지붕 위에서 햇볕을 받으며 쭈그리고 앉아 이 글을 쓴다.
아쉽게도 바티칸 박물관이 1시에 문을 닫고, 이 큰 성당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유럽의 건축물들, 특히 로마는 너무 커서 오히려 내 감성에 맞지 않는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사진 찍기도 힘들다.
가톨릭의 본산에 올 수 있었다는 것과, 작은 나를 보며 제단 앞에 앉아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 넓은 세상에, 수많은 인간들이 이렇게 공경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이나 하실 수 있을지?
"한마디만 하소서"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달리할 방법이 없었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쓰려니 또 눈물이 난다.
같이 살면 잘 우는 것도 전염되나 보다.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길 빌며, 늘 생각하는 남편이….
로 마, Tiburtina 97. 5. 09
엽서에 쓴 대로 오늘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하루를 보냈다.
오후 5시에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를 마쳤다.
그렇게 많은 관광객 중 정작 미사 참석을 하는 사람은 너무 적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인간이 만든 조형물 중 가장 공이 많이 든 작품인 것 같다.
단일 건축물로는 피라미드가 더 크다지만 대리석을 깎아 만든 이 큰 집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신이 인간을 위해 피조물과 우주를 창조했다면 이 성당은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닐지?
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크고 웅장하여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을 생각지 않을 수 없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찬미가 많은 반대 세력과 궁핍을 몰고 왔겠지.
하지만 희생으로 지어진 성전일지라도 이 제단 앞에 서는 후세의 사람들은 신의 위엄에 고개 숙이리라 생각하여 그분들의 노고를 찬양했다.
로 마, Tiburtina 97. 5. 09
또 하루의 일정을 마친다.
8시에 숙소에서 짐을 찾아 티뷰리티나 역으로 왔다.
로마에서 테르미니역이 서울역쯤 된다면 이곳은 청량리역이라고나 할까?
23:30분 밀라노행 열찬데 서둘러 왔더니 3시간의 여유가 남는다.
이제 또 내일의 준비를 해야겠지.
연속되는 강행군에 느낀 바를 그때그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돈의 단위가 계속 달라지고 물가가 뒤죽박죽, 지출을 정리하고 통제하기도 어렵다.
모아 둔 영수증이 벌써 무게를 더해 가는 것을 보니 과다 지출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지금껏 많은 한국인을 만났지만, 로마만큼 많은 한국인을 본 적이 없다.
특히 바티칸에서는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았다.
여행 초반이었으면 반갑게 인사했을 텐데 이제는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하는 단체여행객은 피해 버린다.
나와 보니 우리나라 여자들 화장이 눈에 뜨이게 짙다.
유럽 사람들은 거의 화장하지 않거든. 대신 향수를 누구나 뿌린다.
이제는 면역되어 그러려니 하지만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 향기를 잊을 수 없다.
스쳐 가는 은은한 냄새…. 잊을 수 없는 이곳의 향기를 파리에 가면 당신에게 선물하리라.
이 냄새를 맡을 때마다 유럽에서의 자취를 느끼겠지.
밀라노 – 루가노 – 루체른 97. 5. 10
해발 100 정도의 밀라노에서 3시간 만에 1,000m를 올라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올라갈지 모르지만 내가 타 본 열차 중에 가장 높은 곳을 달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1시간 전 지나온 루가노는 호수를 끼고 있어 풍광이 멋있었다.
일정이 허락한다면 하루를 머물렀으면….
자주 터널을 지나 귀가 먹먹해진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벌써 1,300m에 다다랐다.
내일이면 올라갈 융프라우나 몽블랑은 3,000m를 넘을 테니 그 기대 또한 크다.
왜? 인간은 높은 곳을 좋아할까? 특히 내가 그런 편인가 보다.
지금껏 다닌 도시 중 높다는 곳은 꼭 가려고 기를 썼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오르는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닌지?
"눈높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시야를 어느 곳에 두느냐 따라 분명 사물의 모습이 달라 보인다.
인간관계에도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굉장히 긴 터널을 빠져나와 바로 눈앞에 설산이 보인다.
산새가 험해서 설악산을 보는 듯하다.
지금껏 거의 평지를 돌다 이렇게 산에 오면 고향에 온 듯 푸근하구나.
아이구 왠쑤 같은 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