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 사랑하는 이에게
스위스행 열차에서 97. 5. 10
사랑하는 내 아들, 딸에게
영준아, 솔아. 아빠가 자주 소식 전하지 못해 무척 미안하다.
그간 아무 일 없이 맡은 일에 충실하겠지?
무척 보고 싶구나.
아빠는 아무 걱정 없이 계획한 대로 모든 곳을 돌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또 내일을 준비하고 있단다.
이 넓은 세상을 너희와 함께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너희에게는 많은 기회가 주어질 테니 앞을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아 한 곳에 머무르면 썩는다는 옛말이 있다.
아빠가 여행 중 느끼는 것이 너무 많아서 돌아가면 영준이 여행 준비부터 시켜야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넓고 또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만 생각하고 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좁은 생각으로는
앞으로 이 넓은 세상에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그간의 재미있고 유익한 얘기 들려주마.
그동안 엄마 말씀 잘 듣고 스스로 알아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하고 있을 줄 믿고 온 가족의 건강을 빈다.
루체른 97. 5. 11
To. 영남에게
지난번 짤즈에서 쓴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
모처럼 등산을 하며 자네 생각에 긴 편지를 썼었는데 편지 부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서 돌아가면 사진과 함께 보여 주어야겠다.
자연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우리의 언어는 너무 단순하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이곳에서 숨 쉬는 것의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만큼이라 해야겠지….
그간 정말 많이도 헤매 다녔다.
어제는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마감하고 스위스에 도착했다.
이곳은 루체른, 해발 400m 정도 호수를 낀 도시다.
지금부터 만나는 자연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경하는 그런 곳이리라.
내일은 해발 4,000m 가까운 유럽의 지붕으로 갈 예정이다.
직접 등반하지는 못하지만, 등산 열차로 오르게 된다.
주변을 하이킹으로 돌아보고 다시 알프스의 최고봉 샤모니의 몽블랑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자못 기대가 크다.
그렇게 1주일을 알프스의 자연과 지낸 후 칸 영화제가 열릴 니스와 파리,
홍콩을 거치면 2주일 후쯤 내 여정도 마감하게 된다.
눈 덮인 산을 보면 자네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돌아가는 즉시 매운탕에 소주 한잔 하고 싶다. 정말 할 말이 많겠지….
루체른 97. 5. 11
어제 스위스에 도착했다.
무슨 이유인지 숨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에 통증이 와서 밤새 한잠 못 자고 끙끙 앓았다.
그간 너무 무리를 했나 보다.
새벽에 청심환을 먹고 동이 틀 무렵 잠이 들었다.
푹 자고 났더니 이제는 몸이 정상을 회복한 듯하다.
약 한번 안 먹었다고 자랑했더니 당장 병이 나는구먼.
하긴 힘든 여정이지.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입술은 아래위 모두 부르터서 몰골이 말이 아니지만 아침저녁 물만 보면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 그렇게 흉측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올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니 나는 행복하다.
당신이 옆에 있다면 지금 이 여행이 꿈속 같을 텐데….
아무리 여유를 부려도 짜여진 일정이 빡빡하고 한 곳이라도 더 보려는 욕심에 무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오늘 오후는 포기하고 남은 일정을 정리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진다.
정말 가끔은 휴식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내일은 새벽부터 서둘러야 해. 그래야 나머지 일정을 무사히 마감하지….
틈나는 대로 써둔 편지가 상당히 있으나 부치지 못해 미안하다.
그때그때 느낀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어 희미해지는 것이 제일 아쉽다.
이제 시간이 지났으니 고백할 사건이 있다.
여행 시작한 지 3일 만에 가져간 카메라를 잃어버렸어.
그 후 로테르담 열차 안에서 전자수첩 놓고 내리고….
분실 증명서 받아두었으니 걱정하지 마.
더 웃기는 일은 새로 산 카메라를 비엔나에서 떨어뜨려 고장이 나서 또 하나를 샀다는 것.
집에 가서 고쳐야겠지?
미안해 다행히 이것 말고 잊어버린 것은 없어.
그렇게 걱정되던 이태리에서도 무사했으니 이제 남은 일정 마무리 잘하는 일만 남았다.
갈수록 나도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분명 아무 일 없을 거야.
몸은 완쾌된 것 같으니 걱정 말고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기를….
늘 당신을 생각하며….
융프라우 97. 5. 13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에 올라왔다.
"Top of EUROPE" 내가 서 있는 곳에 이렇게 쓰여 있구나.
정확히 서술하자면 융프라우 산 바로 밑, 융프라우요흐 등산 열차 종점 전망대인데 이 높은 곳에 이런 호화시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2,500m를 넘으면서 구름을 밟는 듯 현기증을 느꼈다.
멀미가 심한 상태처럼 귀도 멍하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빠지는 것을 보니 고소증세를 체험하고 있는 중인가 보다.
어제 날씨가 흐려 걱정했는데 새벽에 일어나니 아주 맑아서 한시름 놓았다.
조금 전 스핑크스 테라스를 나가자 갑자기 구름이 걷혀 정상을 볼 수 있었다.
눈 덮인 빙하를 힘닿는 데까지 걸어 보았다.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순간 순식간에 모든 것이 운무에 싸여 구름 속에
혼자 서 있는 이 기분…. 지금껏 내 여행은 행운의 연속인 것 같다.
당신과 함께 이곳에서 뜨거운 차 한 잔 마셨으면….
몽블랑 97. 5. 14
어제 지구 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공중전화로 당신과 통화했으리라 생각된다.
해발 3,842M. 저 앞 구름에 가린 몽블랑과 빙하에 덮인 이름 모를 산들이 40억 년을 두고 묵묵히 나를 기다린 듯하다.
믿어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이곳에 와있는 걸까?"
유럽을 오면서도 융프라우와 몽블랑 두 곳을 동시에 오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이 두 곳은 기상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조차
보기 힘든 곳이라 한다.
빡빡이 짠 스케줄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내게는 늘 행운이 같이 한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중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마터호른은 당신 손을 잡고 꼭 다시 오리라.
제네바 97. 5. 15
어제 몽블랑을 내려오는 길에 열차 파업으로 발이 묶여 버렸다.
유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리란 상상도 못 했다.
스페인으로 가는 일정을 포기하고 이제 파리로 간다.
한 달 동안 정말 바쁘게 돌아다녔다.
많은 곳을 돌았으니 한두 곳 못 본다고 아쉬울 것도 없다.
파리는 좀 느긋하게 꼼꼼히 볼 수 있겠다.
이것도 하늘의 뜻이려니 한다.
제네바 97. 5. 15
종백에게….
엽서 보내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우스운 예기지만 여행 초반에 전자수첩을 잃어버렸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노트에 남겨 두었어야 했는데.
모든 사람의 연락처가 날아가 버린 거지.
각오는 했지만, 전자수첩은 치명타였다.
이 미안한 마음 돌아가서 갑절로 보상 하마. 물론 나는 잘 지내고…….
아직까지 고추장, 김치 생각 안 하고 있으니 별종인가 보다.
계획한 여정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러하겠고….
이곳에서 가장 근사한 일은 웅장한 대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미사를 드리는 일이다.
참으로 행운처럼 그런 기회가 나에게는 매번 오는구나.
집에서는 주일미사조차 거를 때가 있는데…….
이 여행에서 나는 정말 많은 다국적 친구를 얻고 있다.
형편없는 의사소통 능력 때문에 더욱 나를 아껴 주는 듯하구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진정한 미소나 솔직한 자기표현보다 더 중요한 언어는 없다.
이 사람들에게 내 생각의 모두를 전할 수는 없다 해도 서로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니?
그런 능력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직장 일은 잘 풀리고 있는지? 늦게나마 너의 행운을 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가족을 위해 촛불을 밝히리라.
이렇게 멀리 떨어져 너를 생각해도 그 마음 가까이에서 느끼리라 믿으며
산같이 많은 이야기 짧은 글로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