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럽에서 쓴 편지 6 (프랑스)

To : 사랑하는 이에게

by utbia 김흥수
파 리 97. 5. 16
01-121.jpg 이곳 모르는 분도 있을까?


어이없는 열차 파업에 휘말려 예정에 없던 제네바에서 일박하고 어제 파리에 도착했다.

칸에 가지 못해 속상하지만,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깨끗이 포기했다.

대신 파리라도 꼼꼼히 돌아보려고 마음먹었다.

5일간 파리를 본다면 조금 냄새라도 맡을 수 있겠지.

이제 편지보다 내가 먼저 도착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내일 전화할게….


파리, 베르사이유 97. 5. 18
01-122.jpg 파리, 에펠탑에서 내려다 본 샤이요 궁전


오늘은 베르사이유 궁을 찾아 하루를 보냈다.

징그러운 놈들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인간이 한평생을 살면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우리가 찾는 명소 중 대부분은 정신병자에 의해 남겨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정상인으로 사는 내가 허무해진다.


한가하리라 예상했던 일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

파리가 작은 도시가 아니어서 3일간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다.

내일 하루는 여행을 마무리하고 하루 푹 쉬려 했지만 일이 생겨 네덜란드를 다녀오려 한다.

마지막까지 알차게 보내고 돌아갈게…. 이제 4일 후면 집에 도착한다.

이 엽서를 부치기보다 들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정말 보고 싶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파리의 마지막 밤 97. 5, 19
01-123.jpg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이제 내일이면 홍콩행 비행기를 탄다.

유럽 여행을 마감하는 오늘 그간 미루어 두었던 실수를 한꺼번에 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오르세이 미술관과 퐁피두센터를 방문치 못했다.

체류시간이 길어 여유를 부리다 그 유명한 개선문도 먼발치에서 쳐다보고 만족해야 했다.

돌아가서 그간의 실수담을 말해주지.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지만 아주 작은 일이 여행의 재미를 더한다.

빨리 밤이 지나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다.

언제 이 긴 시간이 지나버렸는지 몰랐는데 오늘 밤은 너무도 지루하다.

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통 잠이 오지 않으니 나는 평생 여행자로 남아 있어야 할까 보다.

보고 싶다. 이제 3일만 기다려 줘.


홍 콩 97. 5. 21
01-124.jpg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가족 대성당


정말 길고도 짧은 휴가였다.

돌이켜보면 어제 김포공항을 나온 듯한데 벌써 40일이 흘렀다.

정신없이 다니느라 어떻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는지….

정리하지 않는다면 이 긴 여행이 하룻밤 꿈속같이 아스라이 멀어지겠지.

그간 당신이 보낸 날은 얼마나 길었을까?

미안한 마음뿐이다. 내 다시는 혼자 떠나지 않으리.

내가 얼마나 당신과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이번 여행을 통해 뼈저리게 실감했다.


보고 싶은 영준아. 솔아!

너희를 생각하며 내 발자취를 남기고자 많은 사진을 찍었다.

얼마나 잘 나와 줄지 의문스럽다만 웃는 아빠 얼굴 속에서 틀림없이 많은 고뇌를 보게 될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젊다고 해도 이 나이에 혼자 전전긍긍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빠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간 많은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부딪혀보니 다른 점도 많았고 어려운 일도 빈번히 발생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언어장벽 때문에 구체적인 대화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아빠는 외국어를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었나 보다.

하지만 계속 공부할 생각이다. 금방 잊는다 해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우리 영준이와 솔이가 넓은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닫힌 지식이 아닌 체험을 통한 산지식이야말로 무엇과 비길 수 없으리라.


아빠는 이제 무사히 이 여행을 마칠 수 있다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다.

목표한 바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 낼 수는 있겠으나 그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느낀 여행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항상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분명 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테니….

항상 사랑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그런 가정을 이루고 싶다.


- 홍콩에서 내일을 기다리며 아빠가….


lu132-1.jpg 2006.06.16. 파리 루브르 Minolta 5D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유럽에서 쓴 편지 5 (스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