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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hole May 20. 2023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리고 그 처음은 대체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

  펀드 매니저들에게 애널리스트 세미나는 자주 있는 일이다. 관심 분야에 대한 애널리스트의 세미나를 통해 해당 애널리스트가 작성한 분석 리포트에 대해 보다 자세히 들어보고,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은 서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의견을 나누는 중요한 자리이다. 그렇기에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핵심 주제는 파악하고 정말 필요한 질의응답이 오고 간다. 만약 겉도는 내용이나 이상한 논리를 전개하거나, 해당 이슈를 잘 파악하지 못한 발언을 내놓는 다면 아마 면전에서는 아니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들 알아서 깎아버리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잘 모르는 분야가 있는 법이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다. 그리고 항상 그렇게 충실한 숙제를 해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묻어가는 것이다. 반드시 질문할 필요는 없으니, 심사숙고하는 것처럼 또는 내용을 다시 머리에 새기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발표자인 애널리스트가 바로 그렇다. 


  애널리스트에 있어서 세미나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리이다. 직접적으로 포지션을 움직이거나, 어떠한 수익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키는 위치도 아니고, 업무 프로세스상에 절대 필수적인 위치라고 하기도 애매한 애널리스트는 분석의 정확성과 그에 수반되는 평판이 가장 중요한 평가지표다. 물론 가장 큰 미덕은 정확한 분석을 통해 앞일을 예언자와 같이 전망해 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평판 또한 중요하다. 유명한 애널리스트의 스피치를 듣기 위해 소속 증권사와의 거래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리포트를 받아보기 위해 계좌를 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평판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세미나는 애널리스트에 나름 중요한 자리이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최소한 자신의 논리가 튼튼함을 증명해 내야 하며, 쏟아지는 질의에 응답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 가장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이다. 모른다고 입을 닫을 수 없고 동문서답을 해서도 안된다. 베테랑 애널리스트는 예상치 못한 질의가 들어와도 다른 쪽으로 우회해서 결국 원래의 프레임으로 돌아오는 마법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다.


  얼마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는 애널리스트를 만났다. 오랜 시간 준비했음이 자료와 발표에 묻어 나왔다. 작은 숫자 하나까지도 세세하게 기억을 하고 발표를 했고, 준비한 자료를 거의 대부분 꼼꼼하게 듣는 이들에게 알려주는 모습에서 틀리지 않겠다는 긴장감을 느꼈다. 하지만 목소리는 조금이나마 떨렸고, 포지션에 목숨을 거는, 하이에나와 같은 베테랑 매니저들에게는 홀로 남겨진 가젤과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폭풍과 같은 질의응답 시간이 찾아왔고, 조금의 틈에도 난도질을 당했다. 질문하는 자들도 어쩔 수 없었다. 잘못된 정보인지 혹은 맞는 시각인지 확인을 해야 했기에 봐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미나가 종료되었다.


  그날의 세미나가 어떤 기억으로 그분에게 남아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아무런 임팩트 없이 넘어갈 수도 있고, 복수심을 불태울 수도 있다. 어쨌든 첫 번째 세미나가 지나갔으며, 무엇을 묻는지 또는 어디를 바꿔야 할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 소중한 첫 경험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무실 안에서 숫자로서 마주하기만 한 데이터들이 처음으로 투자자를 통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신선한, 그리고 색다른 경험이라고 주변의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고백했던 바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가면서 그렇게 조금씩 베테랑이 되어간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리고 그 처음은 결코 달콤하고 행복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쓰고 부끄러울 일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경험을 어떻게 소비하는지에 따라서 앞으로의 길이 조금씩 형태를 잡아갈 것이다. 꼭 애널리스트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지 않는다. 그러니 용기 내어 부딪혀야 한다. 그분도 그러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애널리스트와 세미나를 다시 진행할 때면 아마도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핵심 주제만을 쏙쏙 뽑아내며 여유롭게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경험을 마주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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