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지털전사 Jun 07. 2019

영화 기생충: 누가 진짜 기생충일까? 타인은 지옥이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발전에 의한 것인가?

영화의 엔딩 로고가 오르면 사람들은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썰물과 같이 극장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기 힘들었습니다.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의 가벼움으로 표현했지만 가난이라는 삶의 힘겨움에 고통받는 일가족의 현실적 모습이 크게 다가와 가슴이 먹먹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난한 가족은 구성원 모두가 백수고 뚜렷한 생계 대책도 없었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이 있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매일 쏟아지는 뉴스들에서 드러난 삶의 현실 안에서 가난함은 가정폭력, 왕따, 폭언과 술주정 그리고 학대가 난무하는 끔찍한 지옥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마음속에서 알고 있기에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더불어 두려움도 함께 합니다.


누군가 남긴 감상평 중에 이 영화를 보고 그저 재미있었다면 상류층, 웃다가 묘한 씁쓸함을 느낀다면 중산층, 공포물로 다가온다면 하류층이라고 표현한 글이 있었습니다. 삶의 무게가 힘겹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재벌이든 서민이든 다들 걱정을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며 우리네 삶은 즐거운 기간은 찰나의 순간 일뿐 고통의 연속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그 고통을 마주 대하는 인식의 차이에서 행복과 불행의 다름이 생기고 그 작은 차이가 인생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 단상들이 떠올랐지만 근본적인 의문들을 아래 3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해 봅니다만 일부 누출이 있을 수도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1) 과연 누가 기생충일까?

2) 부자의 능력은 그 사람의 능력에 의한 것일까?

3)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을까?


처음에 기생충은 부자 가족을 위한 과외교사, 운전기사, 가정부로 사기 취업하여 살아가려고 하는 가난한 가족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가족 자신들도 그런 처지를 잘 아고 있어 엄마는 아빠에게 바퀴벌레라는 직설적 표현을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둠 속에서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던 바퀴벌레가 불이 켜지자 마자 사사삭 하고 모두 숨어 버리는 것처럼 가난한 가족은 살기 위해 위장과 사기를 치면서까지 자신들을 숨긴채 부잣집에 들러붙습니다. 주인이 없는 집에서 파티를 벌이다 주인이 돌아오면 숨어야만 하는 가족에게 있어 바퀴벌레와 그들의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인간이지만 돈이라는 절대 권위 앞에 벌레와 인간의 차이는 사라진 천민자본주의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다시 생각해 보니 진짜 기생충은 부자 가족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돈을 잘 버는 능력만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되는 자본 사회에서 부자들은 과거의 왕이나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손짓 하나만으로 자질구레한 일상적 허드렛일을 맡기는 것은 물론 인격 살인에 이를 만큼 자존심을 구겨버릴 일들도 서슴지 않습니다. 고상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뼈 속까지 차별 의식에 찌든 자들이 '갑질'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할 정도의 확률이라는 것을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알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가난은 그 사람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가난한 가족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고자 합니다. 각종 아르바이트에서부터 두뇌 회전이 필요한 일까지 가족 개개인의 능력과 성실성은 영화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합니다(물론 영화적 재미를 위해 블랙 코미디식의 사기들이 난무하고 이는 소시민 입장에서 매우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영악해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다반사로 이들을 법으로 판단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부잣집의 가장은 사업을 통해 큰 부를 거머쥐었고 그로 인해 부인과 자녀들은 우아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돈을 버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분명 큰 장점이요 존경해야 할 미덕입니다. 천재 한 명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어느 재벌님의 이야기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부자의 역할은 과거에 비해 훨씬 커졌으며 사회적 역할 역시 막대합니다. 청소년들이 정직한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 존경할 위인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은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도 사업을 해보니 큰 성공은 결코 개인이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성공은 노력이나 능력보다는 운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음은 사회가 말하기 꺼려하는 금기입니다. 노력으로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계층 상승을 꿈꾸지만 계층이동의 사다리는 운이 좋은 극 소수에게만 내려지는 일종의 로또인 경우가 많습니다. 청년은 꿈을 꾸고 희망을 통해 행복하지만 노력의 배신을 알게 되는 중년이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슬픈 진실입니다.


영화 속 사장님도 치열한 노력과 뛰어난 능력을 통해 사업에서 성공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그의 사업을 도와주고 시장을 개척하여 준 보이지 않는 손의 협력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자신의 노력뿐 아니라 거래처와 사회가 서비스나 상품을 선택해 주는 운이 따랐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사장은 불행하게도 이런 의식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자상해 보였지만 '선을 넘는'것을 제일 싫어한다는 그의 반복되는 대사 속에서 자신의 능력만으로 부를 이루었다는 교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운만 따랐다면 그의 운전기사를 하던 가난한 가족의 가장이 어쩌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거의 대동소이하며 운명의 사소한 움직임이 행복과 불행으로 인간의 삶을 이끄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년이 알게 되는 슬픔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나이 오십에 이르러 지천명이라고 했었던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돈에 역사라는 책에서 보면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중세 시대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태동됐다고 얘기 합니다. 그런데 상공업의 발달은 역설적이게도 페스트가 휩쓸고 간 유럽의 인구 부족 후 생겨났습니다. 전 유럽 인구의 거의 1/3이 죽어간 상황에서 노동력의 부족은 살아남은 자들의 가치를 인식시켜 농노의 해방을 불러왔고 자유로와진 사람들은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 상공업에서 활약하게 됨으로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시대를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움이 그 근본정신이기에 자유가 없는 곳에서 그 뿌리는 말라 죽고 산업은 쇠퇴하게 됩니다. 공산주의를 보면 그 결과를 알 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아보자는 이상에서 시작되었지만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상 체계에서 자본의 꽃은 피어날 수가 없습니다. 중국도 정치면에서는 아직 공산당의 일당 독재 이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만 보면 미국식 자본주의에 진한 화장을 더한 짝퉁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자본의 미래는 자유로움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영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자본주의가 현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인간을 차별하고 신분을 나누고 가난함을 빌미로 삶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결국은 터져버릴 풍선과 같은 모습입니다. 언제쯤 터질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터질 것이며 많은 고통을 수반할지도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돈이 아닌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을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면 걱정이 생기고 불안해지며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리하며 미래에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태복음 6:26~27)'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에서도 돈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됨을 알려줍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숨 쉬고 먹을 것을 제공하는 자연은 인간이 돌아가야 할 절대 고향입니다. 시원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자본주의의 미래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자연 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하루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이 일본을 넘어섰다? 일본이 한국을 혐오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