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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Dec 14. 2021

조경을 배우며 나무를 심다: 철학과 수학의 어디쯤인가.

지난주 취미로 도전해 보고 있는 조경 기능사 실기(작업형) 시험을 보았다. 수십 년간 원예나 조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상으로 살아온 도시민에게 나무를 심는 것은 삽 질로 인한 허리 통증을 다음 날 아침 기상과 함께 마주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다. 20여분의 아주 짧은 시간 내에 1m의 공간에 관목(쥐똥나무)을 심기 위해 삽질을 하는 데 생각처럼 땅이 파지 질 않는다. 빠른 속도로 삽질을 마치고 관목을 심은 후 순식간에 마무리까지 하는 옆 응시자를 흘끗 거리며 초조한 마음에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결국 듬성듬성 심은 나무로 인해 감독관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 한 톨의 씨앗을 뿌려 보는 것, 그저 책으로만 배운 지식은 시험에서는 마음과 육체를 분리시켜 허공을 떠 돌게 한다. 그냥 삽질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것처럼 야외에 나가서 한 번이라도 직접 심는 연습을 해볼 걸 그랬나. 그러나 실기시험의 매년 평균 합격률이 약 90% 임을 감안하면 수학적 통계를 기반으로 예측해 볼 때 합격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예측이 더 합리적이다. 


인생에서 노력은 성공이라는 결과의 부분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수학에서 함수는 조건에 따른 결과 값이다. 투입되는 미지의 수 x에 따라 결과 값 y는 일정하게 바뀌어 간다.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수학은 사실 세상 모든 것을 극도록 추상화시킨 개념의 집합이다. 사과 1개와 바나나 1개를 더하면 2개가 된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과와 바나나를 더하면 부피가 2배가 되는 것인지 질량이 2배가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퉁처서 2개가 된다고 정의한다. 물론 집합 개념으로 1+1=2가 되는 것을 정의하는 것이 수학의 언어이니 기본을 부정하면 형이상학적 철학이 되고 만다.


철학과 수학의 사이에서 삶은 중용을 유지해야만 한다.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겨울에 나는 삭막한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해변을 거닐고 싶을 때가 있다. 찰싹 거리는 파도 소리가 을씨년스러운 해변에서 한 움큼 모래를 집어 본다. 손아귀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의 알갱이는 몇 개나 될까. 세어보기도 힘들 만큼 미세한 모래 알갱이는 손에 잡히는 정도의 양만으로도 평균 1천만 개 이상이라고 한다. 해변에 널린 모래 알갱이들의 숫자처럼 삶은 무한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중요한 하나의 의미를 찾지 못해 모래는 재로 변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있다.


부드러운 모래의 촉감으로 모래를 일부분이나마 알고 있다는 생각도 착각에 불과하다.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모래 알갱이를 축구장 크기로 확대해 보면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자핵은 야구공이나 축구공 크기 정도이며 전자는 워낙 작아서 먼지 보다도 못하다. 즉 99.999%는 빈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빈 공간과 빈 공간의 만남 사이에서 원자핵끼리의 핵력은 뇌에 촉감이라는 의미로 전달된다. 철학과 수학은 이렇듯 삶에 가까이 있다.


관점을 조금만 바꿔 보면 세상만사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어쩌면 큰 고통일 수도 있다. 부모를 잃은 슬픔도 배고픔과 수면의 욕구를 이겨내기는 힘들다. 생존을 위한 노력은 고통을 만들고 연쇄 작용을 일으켜 욕심을 잉태한다. 삶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삶이 주는 의미는 각 개인에게 전 우주의 존재 의미와 같다. 


오늘 힘들고 지친 하루를 보낸 당신에게 한마디를 던져 본다. 시험을 망쳤는가? 투자에 실패했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가? 힘들다는 것은 고통이다. 고통은 힘들다. 생존을 위한 무한 반복의 투쟁에서 한 번이라도 고통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삶을 살아보자. 쉽진 않지만... 노력하는 삶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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