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출장
시작은 번역 알바였지만 금세 시간이 흘러 번역팀을 꾸리게 되었고 어느세 타이틀(게임) 2개가 번역을 마치고 미국에서 서비스 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타이들도 미국 런칭을 앞두고 있었는데 미국 현지화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다양한 의견과 수많은 회의가 오고 갔지만 반영된 변화는 1 도 없었다. ㅋㅋㅋ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봐도 도데체 무엇을 위한 어떤 의미의 시간들이었는지 당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새로운 타이틀의 책임이 되어 운영팀원을 뽑고 번역팀을 계속 돌리고 마케팅에서 온 요청에 따라 기사 자료를 만들고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다 한국 출장이 잡히게 되었다. 보내준다니 간다했지만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 다녀온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차피 작업은 파일로 이뤄지고 소통은 이메일/전화로 하고 내 업무는 영어로 해야하는 부분인데 대체 왜...
일과 상관없이 몇년만에 가보는 한국이었기에 설렘이 매우컸다. 그리고 또 본사건물을 보고나니 아주 약간의 파이팅도 생겼다. 미국지사야 사무실 하나였지만 한국에선 나름 업계에선 이름을 다 아는 회사여서 나 괜찮은 회사 다니나 보다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매일같이 지옥철을 타고 인파에 휩쓸려 타고 내리고를 반복하다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본사에서 친해진 사람들도 많았는데 하나같이 다른 길을 찾는 걸 추천했다.
당시 가정형편 때문에 금전적으로 매달 제로썸 게임을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사정을 알게된 친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영어 강사를 해보라 추천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당시)보다 배는 벌 수 있을 거야란 말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출장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서 하숙집 (개인 2층집에 있는 2층 방 하나를 빌려서 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계산을 시작했는데 몇년간 그곳을 탈출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삶의 기로에 놓인 순간이란 느낌이 들었다. 다음 한 번의 선택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도 있을 것이란 운명적인 느낌?
문득 고등학교 때의 랜선친구가 생각났다. 대학을 다니다가 공부는 본인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차에 짐을 챙겨 대륙을 횡단해서 뉴욕을 이사를 간 녀석. 거기서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간 모험가.
'그녀석도 했는데 나라고 못 하겠어?'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마음을 먹은 후로 퇴근이후의 시간은 한국 영어강사관련 검색을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한국가는 비행기표, 한국에 도착한 후 이동 경로, 체류 신분, 미국으로 송금하기 위한 방법, 미국내에 면허 살려두기, 주소지 변경 등. 막막하기만 했던 삶이었는데 탈출구의 빛이 멀리나마 보이니 곧 행동으로 이어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음 같아선 서프라이즈~ 내일 부터 출근 안해요~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2주 노티스를 줬다.
백수가 되었다.
2007년 1월 2일 한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