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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여행의 이유] 로망? 환상? 아니, 본능!

우리는 떠날 수 밖에 없어서 떠난 것이다.

by 유턴

여행에 대한 환상은 지워진지 오래다.

떠나보지 못한 이들이 보기엔 뭔가 대단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행위지만 다녀와 본 사람들은 안다.

별것 없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왜 유튜브 재생목록을 온통 여행 영상으로 도배해 놨으며 '트래블러'를 보면서 아르헨티나를 그리워하는가?

그것도 이미 두 번이나 다녀온 곳임에도 말이다.

5년 전으로 되돌아가보자.

2015년 6월 2일,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특정 국가를 가야겠다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버킷리스트라는 우유니, 마추픽추 같은 것을 보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심지어 언제까지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었다.

나는 왜 아무 이유도, 목표도, 기약도 없는 여정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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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의 이유는 단순했다.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항상 지도를 끌어안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지리 선생님이셨던 어머니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에는 항상 '사회과 부도', '지리부도'같은 어린이에겐 낯선 이름의 책들이 존재했고, 나는 그걸 자연스럽게 펼쳐보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이런 나라들이 있구나', '생각보다 세상이 넓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가보고 싶다...'였다.

1차원적인 감정이었다.

막연한 끌림이었다.

이런 감정이 자리 잡은 이후로는 그냥 외국이 좋았다.

지도로만 존재하는 저 낯선 이름들이 궁금했다.

저기에는 진짜 사람들이 살까?

아, 당연히 살겠지.

하긴 뉴스의 국제 소식이나 다큐멘터리만 봐도 우리와는 피부색이 조금 다른 이들이 우리와는 조금 다른 생활양식으로 살고 있는 걸 볼 수 있으니.

이때만 해도 여행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해외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거라곤 몇몇 여행 에세이, 뉴스, 다큐멘터리가 전부였다.

이마저도 지금처럼 대중적인 관심은 없었으니 나 역시도 그런 콘텐츠들을 쉽게 접하긴 어려웠다.

그렇게 넓은 세상에 대한 갈증이 있던 채로 스무 살이 되었다.

입시를 실패한 나는 재수를 택했고, 서울의 한 고시원에서 살았다.

그 자체도 나에겐 여행과 같은 개념이었지만 머지않아 더 큰 자극을 받게 된다.

그때가 2006년이었는데 어느 토요일 아침, 학원은 쉬는 날이라 느즈막히 일어나 티비를 켰다.

웬일인지 생전 보지 않는 채널인 9번, KBS1에 맞춰져 있었고, 낯선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2005년 첫 방송 이후로 15년이 넘는 지금까지 방영되고 있는 전설 같은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 속으로'였다.

내가 조금 늦게 틀었으니 한 시간은 되지 않았겠지만 거의 40분 남짓을 애기들이 뽀로로나 코코몽을 보는 듯한 집중력으로 봤다.

와...이거 뭐지?

여행.....

아, 이런 게 가능하구나.

이렇게 외국을 돌아다니는 게 가능한 거구나.

근데 이때만 해도 내가 그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몇 년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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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재수도 망하고, 전역하고 나서 삼수도 망했다.

결국 자퇴했던 학교에 복학하기로 결정하고, 한 학기 동안은 쉬기로 했다.

그때 무얼 할까 고민하다 한창 뜨고 있던 어학연수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감사하게도 부모님이 지원을 해주셨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외국인이 옆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긴장되었던 첫 국제선 탑승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필리핀에서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머리가 아닌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필리핀 시골 여행을 통해 언젠가는 나도 장기 여행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왠지 하게 될 것 같았다.

3개월 후 한국에 무사히 돌아왔고, 5년 후에 난 정말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약 20개월 동안 우리 집 지도에 글자로만 존재했던 곳들을 실제로 누비며, 그곳에서 먹고 자고 싸는 '생활'이란 것을 해봤다.

막상 떠나보니 남들이 했던 것을 바라보며 간접적으로 느꼈던 여행보다 직접 했던 여행이 특별히 대단할 것은 없었다.

사실 내 여행이 볼품없었다기보다 원래 여행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여행의 사전적 정의이다.

이렇듯 사전적으로는 참 재미없는 행위인 여행을 우리는 왜 그렇게, 나는 왜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 막연한 환상이 싹 사라진 지금도 왜 떠나고 싶을까?

요즘 그 답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떠나고, 움직이는 그 자체가 본능인 것이다.

코로나로 어디든 쉽게 떠날 수 없는 지금도 이탈리아가 국경을 풀자마자 베네치아에 인근 유럽 국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리적 특성상 외국을 자유롭게 갈 수는 없을 뿐이지 국내 휴양지, 캠핑장 등은 주말이면 엄청나게 붐빈다.

동해안이나 제주도의 주요 숙소들은 예약을 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최악의 상황은 지나왔기 때문에 느끼는 일종의 방심일까?

아니면 인간이 멍청하기 때문에 병이 걸리든 말든 떠나는 것일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건 본능이다.

물론 마스크를 하지 않는다거나 위생을 등한시하는 행위는 공동체 사회에 피해를 끼치는 행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떠나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여행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움직이는 것이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p.87-


5년 전의 나도 떠날 수밖에 없었기에 떠났던 것이다.

물론 어릴 때 끼고 살았던 지도나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그런 본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맞지만 인간은 누구나 떠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어릴 때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수많은 이사와 전학을 경험하였다.

그래서 본인에게 방랑은 일상이었고, 당연한 일들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성인이 된 후 수많은 여행을 반복하게 된다.

어쩌면 지겨울 수도 있는 그 일을,

질렸을 수도 있는 그 과정을 말이다.

내가 파라과이에 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떠나지 못함이었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의 특성상 국외 휴가가 아니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고, 국내 여행도 휴가를 사용하여 일정 기간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실제로 몇 년간 떠나지 않더라도 그리 괴롭지 않은데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제한되는 것은 나에게 견디기가 꽤나 힘들었다.

그래서 2년의 임기가 끝나면 한국에 오기 전에 중남미를 다시 싹 돌고, 뉴욕에 있는 친한 동생까지 만나고 오려 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급하게 귀국한 지금, 훨씬 더 강력한 제약이 찾아오니 떠나고자 하는 욕구는 몇 배 더 강력해지고 있다.

사실 파라과이에 도착하고,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는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또다시 떠도는 불안한 생활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여행도 볼장 다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내 휴가 때 파라과이 곳곳을 여행하며 '아... 내가 착각을 했구나.'를 깨달았다.

여행에는 끝이 없고, '나'라는 인간은 어딘가로 계속 움직여야 사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인간은 수천 년 전부터 수없이 움직여왔던 본능이 있다.

그것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고, 원천이다.

코로나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지 못하는 요즘 우리는 그것을 더 실감하지 않을까 싶다.

반대로 이렇게 여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여행의 이유', '여행의 의미'에 대해 더욱 깊게 고찰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단기간에 자유로워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아주 멀지 않은 어느 날에 설레는 마음으로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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