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보나 마나 심드렁한 대답이 나올걸 알고는 있었다. 이제는 서운하다거나 기분 나쁜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다. 그래도 F와 함께 산 세월이 8년이기에, 진화된 T의 대답은 차별성이 있을까 싶어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본인의 관심사로 꽉꽉 들어찬 뇌 속에 유행하는 짤 따위가 비집고 들어간 공간이 없다는 걸 알기에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짤의 질문을 한 것이다.
" 오빠~ 나 오늘 우울해서 빵 샀어."
"... 그래서?"
...
우울해서 빵을 산 아무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야기가 네 말의 본론은 아닐 테고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냐는 말을 세 글자로 표현한 대답인 듯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의 줄임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 남편의 MBTI 성격 유형의 극단적인 T 인간이다.
타인 이해하기 매우 유용한 MBTI라는 성격 유형 검사 덕분에 남편이 '못된 놈'이 아니고 '사고형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지만 가끔씩 남편에 대한 감정이 격해질 때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르긴 한데 나쁜 놈 아니야? 다른데 나쁜 놈일 수 있는 거잖아.
다름을 겸허히 받아들이기에 꽤나 억울한 면이 많았다.
나는 주로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원하고, 그의 따뜻한 언어를 기대하지만 그는 주로 혼자이길 원하고 나에게 특별히 원하는 게 없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아쉬운 입장이고, 바라는 입장이라는 거다. 그의 T스러움은 강인한 멘탈의 꽤나 독립적인 인간상으로 멀끔히 포장되지만 F는 어쩐지 감정에 치우친 약해빠진 징징이 같은 느낌으로 나를 더욱 서럽게 한다. (내가 자존감 낮은 F이기에 생겨난 왜곡일 수 있겠다.)
남의 눈치를 보며 습관성 리액션을 난발하고, 대화의 정적 의 순간에 대화거리를 찾아내기 위해 뇌를 풀가동하는 고된 일상을 보내고 침대에 누우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나 다시 태어나면 T로 태어날래.
다시 태어날 수는 없으니 새로 태어난 아이라도 T이길 염원했다. 남자 아이이니 더욱 T 유형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빼빼 마른 나의 체형까지 닮아버리면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치일 것만 같았다. 반면 T유형의 아들이라면 어딜 내놔도 크게 걱정되진 않을 듯 하다. 하지만 그 경우 내가 걱정이다. 아들인데 T이기까지 하다면 최소 중2 이후로는 무자식 신세나 다름없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성장이 워낙 빠르니 내게 자식이 존재하는 데에는 10년도 채 안남지 모를 노릇이다.
나를 닮은 수다쟁이 F아들이라면 남편과 소통하지 못한 소소한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나누며 꽤나 즐거운 삶을 영위하겠다 싶다가도 허구한 날 사사로운 고민을 들고 와 시름시름 앓는다면 나는 노년에 걱정만 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든다.
그러다 보니 내 아들이 T일지 F일지는 쓸떼없지만 꽤나 진지한 고민거리였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다가 등장인물이 우는 장면에서 같이 울먹이기라도 하면 그 마음이 예뻐 머리를 쓰다듬다가도 '가만있어봐 얘 F인가'하며 흠칫 놀라하고, 함께 격하게 놀다가 다치게 되어 엄마다쳤어아파호해줘 라며 슬픈 연기를 해대도 까르르 웃으며 사라지곤 하는 아이에 모습에 '어머 쟤 T인가 봐'하며 찝찝한 안도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어느 정도 아이가 자라 의사소통이 가능한 순간이 오자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꺼내보았다
"튼튼아. 엄마가 아까 전에~ 슬퍼서 빵을 샀어."
"빵? 어디서?"
질문을 하자마자 워낙 빵을 좋아하는 아이이다 보니 T과 F 판별 질문으로 부적합 할 수 있겠다 싶은 순간 아이가 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왜 슬퍼-어?"
순간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빡 맞은 느낌이었다.
인간은 O 아니면 X이기만한 몰개성한 존재들이 아니었으며 O이면서도 X일수 있는 △의 존재인 것을. 왜 항상 극단적인 양 끝날 만을 떠올리며 무수히 많은 날을 걱정하고 염려했던 것일까.
그 에너지를 모두 모아 아이의 건강한 양육에 쏟아붓는다면 극단적인 면모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둥글어지기 마련 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망각하고 사는 내게 아이가 뒷통수를 후려친 것 같기도 하다.
우울한 빵집에는 우울한 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걱정할 시간에 맛있는 빵이나 먹고 힘차게 나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