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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방학엔 죄를 지으러 갑니다.

by 유유이


언제부터인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는 게 오히려 더 피곤했다.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딸내미 모드로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지만 그 또한 편치가 않았다. 손자와 놀아주다 힘에 부치는 아이고아이고 하는 낮은 신음이 문밖에서 자주 들려오니 누워는 있지만 곧장 일어날태세로 어정쩡하게 있게 되었다. 그렇게 불편한 휴식을 취하다가 대게 1시간도 안 돼서 일어나 애엄마의 신분으로 돌아가곤 했다.

오늘은 또 무얼 해 먹지의 정신적 노동을 쉴 수 있었던 엄마찬스도 노쇠한 노인에게 짊어지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의 음식들도 엄마와 함께 늙어버린 건지 맛이 예전만 못했다. 요즘은 엄마가 먼저 나가서 사 먹자고 이야기하시는 걸 보면 이제는 밥 차리는 것도 힘에 부치는 듯했다.


아이도 도와주질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한 사랑에 취한 듯 줄곧 과흥분 상태로 있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낮잠 재우기는 늘 실패고, 다크서클에 뒤덮여도 혼수상태로 놀겠다고 설쳐대니 육아 난이도가 최상으로 올라간다.

부모님은 그런 아이를 보며 우리 딸이 평소에 얼마나 힘들지 걱정하며 딸내미의 고단함을 덜어주려 혼신을 다하신다

하지만 그걸 누리기에 부모님은 너무 늙었고, 나는 그럭저럭 철이 들었다.


그럭저럭이라고 표현은 한 것은 나의 싸가지 때문이다. 오랜만에 부모님께 손자도 보여드리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만났다가도 온갖 잔소리와 짜증을 참지 못하는 싸가지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젊음을 갉아먹고 자란 주제에 부모님의 무거워진 걸음과 흐려진 판단에 타박을 일삼았다. 누워서 유튜브만 하는 아빠의 안위가 걱정되어 화를 내고, 비싼 옷도 여행도 모르고 자식만을 위해 산 엄마가 안타까워 화를 냈다. 슬프고 미안하고 속상한 것들이 왜 모조리 화로 분출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핸드폰을 덜 보겠다는 다짐처럼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니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는 길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이 어린이집 봄방학 공지를 보고는 선뜻 부모님 댁에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육아 동지들과 공동 육아를 하는 게 오히려 더 나은 것 같아 약속을 잡으려던 찰나에 엄마에게 SOS 연락이 왔다. 요양보호사 일을 하시다 보니 주기적으로 강의를 이수해야 하는데, 싸가지 없는 딸내미의 도움이 필요했다.

'엄마가 아무리 해보려 해도 안 돼. 아주 짜증 나 죽겠네. 딸내미 시간될 때 이것 좀 해줄 수 있나요?'

공손한 엄마의 모습은 질책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미안했다. 이거라도 도와드려서 그간의 악행을 감형받아야겠다는 얄팍함으로 아이를 데리고 홍제동의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다행히 엄마의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정차해 놓고 기다리자 아이가 앵무새처럼 종알거렸다.

"여기가 할머니집이야? 왜 할머니네 안 가? 여기 어디야? 할머니 집에 가자. 왜 안 가?"

아이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할 무렵 다행히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환하게 달려오는 엄마를 보자 안도의 웃음이 났다.


동네에서 유명한 초밥집을 찾아가니 다행히 마지막 테이블 자리가 있었다. 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가 어색해서 인지 낮잠시간이 되어서인지 입을 삐죽거렸다가 고개를 새초롬히 돌리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내셰끼,우리셰끼하며 외면된 볼에 얼굴을 파묻고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초밥을 한 입 베어 물자 입에서 살살 녹았다. 엄마 입맛에도 맞았는지 초밥이 목구멍을 넘어가기 무섭게 진부한 멘트가 흘러나왔다.

"아까 그 집 할머니네서 누룽지랑 고구마랑 잔뜩 먹었어. 엄마는 배불러. 너 많이 먹어. "

잔뜩 먹었다는 음식 메뉴라도 바꿨으면 싶은 지겨운 '엄마는 배불러' 타령에 짜증이 몰려왔지만 정신을 똑띠 차렸다. 너는 면죄부를 받으러 왔잖아. 정신 차려.

"엄마 맛있네. 배불러도 더 먹어봐. 종류별로 맛만 봐봐."

마지못한 척하며 드는 숟가락 앞에 따끈한 튀김과 초밥을 옮겨 놓았다. 엄마가 늘 그랬던 것처럼.


평생을 올빼미로 산 아빠는 요즘도 새벽 내내 핸드폰만 보다가 아침쯤 잠이 들곤 한다. 내 결혼식에도 지각을 했던 악명 높은 저녁형 인간이시다. 그런 아빠가 이른 아침부터 말똥한 눈을 하고 계셨다. 전날 손주와 신나게 놀아준 탓에 일찍 잠들었다 조금이라도 손자를 더 보고픈 마음에 일찍 일어난 것이다. 손자매직, 아니 손자기적이다. 이럴 때라도 바삐 움직이시라고 아이를 아빠에게 잠시 맡기고 집을 나섰다. 오전에 일을 나가신 엄마가 오시기 전에 홍제동에 새로 생긴 빵집에 들르기로 했다. 인기가 좋아 금방 품절된다기에 오픈시간에 맞춰 나왔는데 살짝 여유 있게 나온 탓에 가는 길을 찬찬히 구경해 가며 걸었다.


경기가 안 좋은 탓인지 이곳 홍제동은 올 때마다 가게 서너 군데가 다른 가게로 바뀌거나 비어있다. 대로변으로 내려가 큰길건너에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며, 여러 가게들이 들어 선 걸 보니 구경할 거리가 더 많아졌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외곽에 위치한 데다가 주변이 재개발 준비 단계라 휑한데, 이리 빽빽한 가게들을 보니 언제 이 동네에 살았나 싶게 생소했다. 으리으리한 신축 아파트 단지 바로 건너에 오래돼 보이는 이발소가 보였다. 새 가게들을 신나게 구경해 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래진 가게 앞에서 더 이상은 홍제동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니치니치베이커리-홍제동에 보기드문 맛집.



어딘가 모르게 힙한 느낌이 드는 이발관.



마음 같아서는 명동이나 홍대로 달려가 쇼핑을 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자주(JAJU) 매장으로 들어갔다. 언제부터인가 무난한 제품을 적당한 시간 내에 구매할 수 있는 유니클로나 무인양품 같은 브랜드 즐기게 되었기에 홍제동에 오면 코스처럼 자주매장에 들러 쇼핑 욕구를 풀곤 한다.


아이쇼핑을 끝내고 나오자 길거리에 미역귀가 팔고 있었다. 오독오독한 식감을 좋아하는 엄마는 미역귀를 좋아하셔서 한 번씩 사 오시곤 했는데 먹을 때마다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가난한 시절 먹을 게 없다 보니 할머니께서 시장에 버려진 미역귀를 주워다가 자주 먹었는데, 어린 엄마는 고사리손으로 그걸 들고 가게에 가 사탕이나 과자와 바꿔먹었었다는 이야기다. 엄마를 닮은 나는 그 미역귀를 과자와 바꿔 먹지 않고 엄마와 함께 초장에 찍어 오독오독 씹어먹었었다. 출가한 이후론 잊고 지낸 미역귀를 오랜만에 보자 반가운 마음에 한 봉지를 사서 온기가 남아있는 빵을 든 반대손에 집어 들었다.

아이와 남편의 저녁을 챙기고 씻기고 재우고 하는 갖가지 숙제의 나라를 떠나 망나니의 나라에 여행을 온 듯,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홍제동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아빠에게 40분 정도 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그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조급하지 않았다. 문득, 유일하게 부모님 앞에서만 제멋대로 일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어쩐지 마음껏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았을 그 응석을 말이다.


할머니집에서 노느라 이틀 동안 낮잠도 안 자고 활개를 치는 아이는 어른 셋의 넋을 차례대로 꺼트렸다. 놀이터에 가자고 조르는 손자에게 엄마는 놀이터에 무서운 개가 있어서 못 간다고 드러누운 채로 으름장을 놓고 있다. 아빠는 이미 지쳐 거실 소파에 이불도 덮지 않고 선잠에 빠져있다. 더 있다가는 온전히 운전을 하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예상보다 일찍 돌아갈 짐을 부랴부랴 챙겼다.

엄마는 벌떡 일어나 부엌에서 부시럭 부시럭 챙겨 나왔다.

어제저녁, 아이가 잘 먹었던 뼈국 한통 가득과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어 하나도 먹지 못한 미역귀 봉지가 들려있었다.


안 가져가. 무거워.

차 타고 가는데 뭐가 무거워. 애가 엄청 잘 먹더만. 미역귀도 먹고 싶다며.

다음에 가지고 갈게.

뭐가 다음이야. 가져가서 부지런히 먹으면 되지.

아 싫다고 &^#*(@*;';:'!)$*¤¥》~={¥


누적된 피로 탓일까.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을 두고 증을 내버렸다. 병이 도지는 데에는 1박 2일이 마지노선인 듯했다. 사실 어제저녁에도 부모님 댁의 물 때 가득한 가습기를 애써 닦았더니 가습기 부품이 하나 없어진 것 같다느니 하며 궁시렁거리는 아빠에게 빽 한번 내질렀으니 못 고치는 불치병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엄마. 아빠. 조만간 또 올게.

그렇게 나는 다음 죗값을 치르기 위한 죄를 짓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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