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받는 운동장

by 유유이


날이 부쩍 추워졌는데 야외로 소풍을 다녀온 날이라 꽤나 걱정이 됐다. 꽁꽁 싸매서 등원시키긴 했지만 독감이 유행이다 보니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감기 안 걸리게 빨리 데려와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일찍 하원을 시키러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잠시 주차했다 바로 나갈 예정이니 어린이집 입구에 떡하니 주차를 해놨는데 아이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모래놀이터에서 놀고 가겠다는 것이다. 곧 하원시간이라 빨리 차를 빼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대안을 제시하고 황급히 차에 태웠다.

오늘 소풍도 갔다 오고 피곤하니까 그럼 조금만 놀고 가는 거야?

모래놀이터가 있는 집 앞 초등학교에서 30분만 놀고 가기로 꼭꼭 약속하며 출발했다. 아침에는 꽤나 쌀쌀했는데 다행히 오후에는 날씨가 좀 풀린듯했다. 그래도 해가 짧아져 금방 추워질테니 최대한 빨리 집에 가야 한다며 분주하게 이동했다.


아직 볕이 들어서인지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안심하며 넋을 놓고 방심하는 사이, 아이가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졌다. 적당히 깨작거리다가 집으로 데려갈 계획이었는데 아이는 본격적으로 판을 벌리고 말았다. 나까지 신발을 벗어버리면 너무 판이 커질 것 같아 내 발만은 사수하려 했지만 아이가 신발 안으로 모래를 퍼붓는 바람에 결국 나까지 벗어던지고 말았다. 이상하게 맨발을 벗으면 뭔가 계획한 루틴의 빗장이 열려버리기라도 한 듯 에라 모르겠다의 마인드로 돌변하게 된다. 독감이고 저녁밥이고 모르겠고 광란의 놀이를 벌여보자라는 마음이랄까. 모래를 푸고 묻고 던지며 노는 사이 멀찌감치서 축구를 하던 아이들이 우리 쪽으로 와 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네를 타고 놀기 시작하더니 우리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 아이들을 은근히 관찰하고 있었다. 이 동네 아이들의 분위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4세 고시라는 말이 생길 만큼 요즘 4살은, 콧물 흘리며 사탕을 빨아먹는 나이가 아니라, 앞으로의 교육을 미리 계획해야 할 시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벌써 또래 부모들이 학군지를 고려하며 이사 계획을 세우기도 하니 말이다. 나이가 먹어가며 환경의 중요성을 점점 실감하니 교육열이 높지 않은 나조차도 학군지를 따라가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단순히 공부 잘하는 것을 기대해서라기보다 학군지의 아이들이 대부분 기본 생활 태도가 뛰어나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 듣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학군지역이 있다 보니 우리 동네 아이들과 그 동네 아이들이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는 이야기도 최근 꽤나 듣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당장 학군지로 이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일단은 이곳에서 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받아들였지만 이 동네 아이들이 불량한 분위기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상 깔려있었다. 그래서 동네 학생들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모래를 파고 던지고 하면서도 귀는 그 아이들 쪽으로 향해 있었다. 조금 거친 말이 오가기도 했지만 우리 어릴 때마냥 장난스레 그네를 타고 낄낄 대며 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노는 모습을 보았는지 어느새 그 아이들도 신발을 벗고 맨발로 놀고 있었다. 나와 아이가 맨발로 노는 게 재밌어 보였나 싶어 약간은 뿌듯해하며 놀고 있는데 튼튼이가 그 학생들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맨발로 씨름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밀치고 들어 넘기며 힘을 쓰고 있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주춤거리더니 한 아이가 말을 꺼냈다.

"야 근데 애기가 우리 보고 배우면 어떡해."

"그런가. 아 나쁜 거 배우면 안 되는데."

순간 깜짝 놀랐다. 서로 밀치고 겨루는 놀이를 보고 행여나 어린 동생이 폭력적인 행위로 배울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이 너무 귀엽고 기특해서 괜찮다고 말해줘나 고민하는 사이 아이들은 다시 씨름 놀이를 시작했다. 그 놀이가 재밌어 보였는지 튼튼이는 한참 형들을 지켜보더니만 놀이의 흐름을 다 마스터했다는 듯 나에게 제안을 했다.


"엄마. 우리도 밀기 놀이하자."

아이는 형들의 씨름을 '밀기 놀이'라고 명명했다. 그래. 맨발에는 씨름이지.

나는 씨름의 룰도 기술도 잘 모르지만 샅바 대신 아이의 바지춤을 붙잡고 밀고 당기며 놀이를 시작했다. 우리를 따라 하며 맨발이 된 초딩들과 그 아이들을 보고 배운 우리가 운동장 한켠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 한판 승부가 이어졌다.


결국 둘 다 모래에 뒤덮인 꼬질이 신세로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갔다. 찬바람도 오래 쐬고 더러운 바닥에서 나뒹굴었으니 감기에 걸리려나 걱정이 밀려왔지만 늦은 저녁을 급히 차리고 피곤한 몸으로 눕자 걱정할 새도 없이 아이와 함께 떡실신으로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콧물 하나 없이 개운한 얼굴로 아이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밀기 놀이를 하자고 조르곤 한다. 아이와 서로 몸을 맞대고 밀치고 당기고 하는 놀이를 하며 깔깔 웃다 보면 종종 이 놀이를 알려준 그 학생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은 마주한 동생을 배려할 줄 알았는데, 정작 나는 그 아이들을 평가의 눈으로 지켜보았으니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독감이든 학군지든 세상은 언제나 소문처럼 흘러가지만은 않는 것 같았다. 떠도는 소문에 두려워하며 꽁꽁 숨고 선을 긋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른들은 참 겁이 많은 것 같다. 그때 만난 학생들이 나에게 일러준 것 같기도 하다. 너무 겁내지 말라고. 호통을 쳐준 것 같기도 하고. 마주한 아이들의 멋진 모습에는 엄지를 척 들어주고 서투른 모습에는 관심을 기울여주는 진짜 어른이 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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