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들
산호에서 나온 『단순한 열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이라 눈에 띄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책은 페이지수가 꼬인 파본이지만 일부러 바꾸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은 민음사에서 2008년에 다시 나왔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황제’임에 틀림없지만 나는 황제를 뺀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알렉시』와 『세 사람』은 절판된 후 다시 출간되지 않았다. 톨킨의 『『실마릴리온』(번역 문제로 원성이 자자했는데, 『반지의 제왕』 덕에 다른 출판사에서 새 판본이 나왔다)이나 이탈로 칼비노의 『코스미코미케』, 카렐 차페크의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 같은 책을 읽었을 때의 신선함은 아직도 기억난다.
소설은 내 인생 독서 아이템 중 하나다. 한창 내 인생이 복잡할 때 잠깐 소설 읽기가 시들해진 적도 있었지만 소설은 영원한 내 사랑! 한국 현대소설을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대학생이 된 오빠가 읽던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부터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교양 있는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제1회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최인호의 「두레박을 올려라」다. 본상 수상작은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이었는데,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히 몇몇 장면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하나는 주인공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와 낮잠을 자다가 어스름 무렵에 일어났는데, 아침인 줄 알고 헐레벌떡 학교에 갔던 일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해 뜰 무렵과 해질 무렵이 너무 비슷해서 어릴 때 나도 가끔 이런 착각을 했다. 나는 실제로 학교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늦은 줄 알고 학교에 달려가 친구들이 하나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막막함과 두려움을 알 것 같았다.
백령도에 살 때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그곳에서는 ‘간첩선’이라 불렀던 북한 선박이 종종 나타났는데, 이게 나타나면 온 섬에 비상이 걸렸다. 사람들은 ‘방공호’로 피신을 하고 섬 전체가 소란해졌다. 밤새 사이렌 소리에 맞춰 방공호와 집을 몇 번씩 오간 적이 있었는데, 그런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면 교실이 텅 비어 있곤 했다. 전쟁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 결과가 그런 텅 빈 교실이라는 것만은 또렷했다.
또 다른 장면은 가난한 주인공이 너무 배가 고파 친구들과 손가락을 잘라 먹기로 하고 어느 손가락이 가장 불필요한지 의논하는 장면이었다. 엄지손가락은 으뜸을 나타내야 해서, 둘째, 셋째손가락은 글씨를 써야 해서, 넷째손가락은 결혼반지를 끼어야 해서, 새끼손가락은 콧구멍을 후빌 때 써야 해서 포기하는 장면이었다. 결국 새끼손가락은 약속하는 손가락이어서 포기하고 대신 비둘기를 잡아오지만 그것 역시 ‘평화’의 상징이라 놓아 준다.
주인공은 인간은 하나쯤 없어도 그만일 손가락에조차 왜 당장의 쓸모뿐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까지 부여하는 걸까 이상하게 여기면서 막상 자신들도 책을 팔지 못한다. 먹을 것을 구하느라 모든 것을 다 팔았으면서도 자유의 상징이었던 책만은 팔 수 없다고 여겼다. 정말 책은 자유의 상징일까? 소설은 공감하게 했고, 발견하게 했다.
대학 초년생일 때 읽었던 소설은 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세상의 온갖 고통을 대면하게 하고 내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자꾸 가져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세상은 온갖 갈등과 비극, 모순이 산재해 있는 곳이고 개인은 오로지 희생자거나 그 모순을 깨닫고 저항하는 각성한 인간뿐이었다. 그런 소설들을 읽고 있으면 작은 죄책감이 들었다. 내 행복이 훨씬 중요하게 느껴지는 게 무슨 큰 잘못 같았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과 자신의 행복을 내놓는 사람이 실제로도 너무 많았다. 숱한 노동자와 농민, 수배를 받아 쫓겨 다니거나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는 선배들. 그런데 나는 도서관이나 들락거렸다. 수많은 작가들 가운데서도 임철우와 이창동, 김소진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이들은 사회의 모순이나 거대한 사건의 영향 안에서 고통을 겪는 소시민 이야기를 많이 썼는데, 그들이 꼭 나 같아서 그랬다.
그 소시민 주인공 곁에는 꼭 이상을 추구하느라 가까운 사람을 고생시키고 계속 갈등 상황에 몰아 넣는 사람이 있는데, 언제나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이창동의 단편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 나오는 이복형제 준식과 민우가 매우 전형적인데, 형 준식은 평생 “안정된 생활, 잠잘 곳을 걱정하지 않고 일자리를 잃고 쫓겨나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안온한 생활”을 꿈꾸며 세상과 타협해 가며 살아왔고, 동생 민우는 세상이 바뀌든 안 바뀌든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삶을 사느라 수배자가 되어 형 집에서 얹혀 지낸다.
윤리적으로 동생의 삶을 지지하다가도 버스비를 아끼려고 아이들이 미취학 아동이라고 거짓말하는 어린 시절 삽화와 겹치면 모호해진다. 엄마의 거짓말을 도우려고 덩치만 큰 모자란 아이처럼 보이려고 애쓰던 준식 곁에서 태연하게 자기는 여덟 살이라고 말하는 민우가 너무 얄미웠다.
임철우는 분단이나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파장 안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다루면서도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틋함을 보여 주었다. “모든 인간은 별”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 섬에 가고 싶다』나 사람은 모두 외롭고 좌절하고 미워하고 슬퍼하는 별들이지만 때로 항로를 잃은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준다고 말하는 『등대 아래서 휘파람』까지, 그의 소설은 그 시기 초라한 나 자신을 견디게 하는 빛이 되어 주었다.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남미나 유럽 소설 등은 숨통을 틔워 주었다. 특히 여성의 욕망과 실존에 대해 충격적일 만큼 강렬하게 쓴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나 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작가의 책은 내 취향에 ‘프랑스 여성 작가’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단순한 열정』과 『아버지의 자리』를 처음 읽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탁 트이던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은 1990년대 한국 사회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내게 인간 보편이라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1951년에 출간된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작가가 처음 쓰려고 마음먹은 것은 1927년이다. 유르스나르는 플로베르의 서간집에서 본 한 구절, “신들은 더 이상 있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있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홀로 있었던, 바로 키케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까지의, 유일무이한 순간이 있었다”에서 이 책을 시작했다. 유르스나르에게 하드리아누스는 “인간 그 자체, 혼자이나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는 인간”이다.
이 소설은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살았던 로마 황제의 화려함이나 긴박감 넘치는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오로지 한 인간이 삶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에 집중했다. 사랑과 상실, 실패와 늙어감, 그리고 죽음까지. 줄거리를 말하라면 단 한 줄로밖에 말할 수 없는 이 책을 다 읽은 날 가득 차오르던 감동과 감격을 잊지 못한다. 수천 년 전의 사람과 지금의 나 사이에 근본적으로 이어져 있는 접촉 지점들을 하나하나 만져 본 느낌이었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은 열림원에서 선집으로도 펴냈는데, 여기에 유르스나르의 『알렉시』, 『세 사람』이 포함되어 아주 기뻤던 기억도 난다. 소설 읽기를 시간 낭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은 자기계발서처럼 한 마디로 선명하게 인생의 진리, 해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줄거리로 요약하면 A4 용지 반장이면 될 것을 300쪽이 넘는 장편으로도 풀어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소설은 인간의 삶 속의 모든 감정들을 세세히 살펴보고 새롭게 표현한다.
사건들이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할 때 그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슬픔이나 기쁨, 노여움, 즐거움을 모두 그린다. 그래서 소설은 다른 책처럼 발췌해 읽거나 건너뛸 수가 없다. 이 감정의 세목들이 자세해질수록 우리는 삶을, 인간을,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상과 세대가 달라지면 당연히 감정의 표현도, 사회적 상상력도 달라진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소설이 계속 쓰여야 하는 이유다. 계속 쓰이는 이상, 나 역시 계속 읽을 것이다. 소설 독자가 점점 줄고 있는 중에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소설을 계속 펴내는 젊은 작가들을 응원한다.(열심히 사서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