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름의 나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샤 Aug 01. 2023

이름

름의 나열 ch.1


C는 단편영화 촬영이 끝난 후, 촬영 소품으로 사용했던 물고기를 아무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아서 얼떨결에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무늬도 없이 온몸이 다 선명하게 붉은 베타 한 마리가 작은 사각형의 어항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직접 만질 순 없었지만 화려하게 주름진 큰 지느러미는 분명 부드러운 꽃잎의 촉감이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너무 예쁜 자태에 내심 감탄했다. 이름.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얘는 이름이 뭐야?”

“이름이 없어.”


C는 ‘당분간’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따로 이유를 덧붙이진 않았지만, 알 것만 같아서 더는 묻지 않았다. 어항 옆엔 마트에서 급히 사온 베타용 먹이가 보였다. C는 물고기가 밥을 잘 먹지 않는 것 같아서 어떤 방법으로 먹여야 하는지 많이 찾아봤다면서,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아는 C는 겉으로 티를 잘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들킬 수밖에 없을 만큼 잔정이 많은 사람이다. 아마 이름이 ‘당분간’ 없을 이 물고기와 지내게 될 시간의 길이를 섣불리 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실의 깊이는 붙였던 정의 농도와 비례한다. 이름을 붙이는 건, 정을 붙이는 일이다.




어릴 때부터 이름이 예쁘단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디든 이름을 얘기할 일이 생기면 독특하고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곤 한다. 성도 성이지만, 이름도 흔하지 않아 여태 동명이인을 본 적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SNS 서비스가 출시될 즈음엔, 지나간 세월로 잊혔던 인연들이 프로필에 적힌 내 이름으로 나를 알아보곤 했다. 이름의 어감은 간지러운 느낌인 것 같아 아직도 썩 내 취향이 아니지만, 가진 뜻은 제법 마음에 든다. 나는 아빠의 성을 딴 첫 글자와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구시대의 돌림자 풍습으로 붙여진 마지막 글자를 제외한 가운데 글자만 내 이름으로 생각한다. ‘아침’이란 뜻이다. 이름만큼 나는 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됐다.


내 이름은 아빠가 밤낮으로 사전을 뒤지며 지었다고 했다. (추후 들은 얘기지만, 외할아버지는 손녀딸의 이름으로 ‘황성’이란 두 글자를 좋은 뜻이라며 가져오셨다고 했다. 엄마가 절대 반대하셨지만.) 앞서 내 이름의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서술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발음의 생김새와 별개로 이름이 참 단단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늦은 나이에 첫 딸을 안아보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앞으로 영원히 안고 싶은 소중한 존재의 이름을 처음 소리 내어 부르던 마음이 어땠을까. 그때의 소리의 파동, 입술의 떨림을 기억하고 계실까. 나는 아직 모르지만, 아마 그럴 것 같다.


내가 이름을 무게를 깨닫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층이 낮은 빌라에서 살았을 때, 시골 동네답게 길고양이들이 꽤 많았다. 나는 자주 마주치고 어울리던 고양이들마다 털 색과 무늬를 따서 이름들을 지어줬다. 까망이, 얼룩이, 노랑이… 나를 곧잘 따르기도 했던 이 고양이 친구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하나씩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제 이름을 알아듣고, 부르면 꼬리를 치켜세우고 따라오기도 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만큼은 나의 까망이, 나의 얼룩이, 나의 노랑이다. 세 고양이의 존재가 또렷해지던 어느 날. 갑자기 까망이와 얼룩이가 떠난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게 사라졌을 때, 그리고 이웃이 쥐를 잡기 위해 놓았던 약을 잘못 먹은 노랑이가 구토 위에 죽은 채 발견되던 날, 나는 그제야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일의 무게를 알게 됐다. 까망이와 얼룩이, 그리고 노랑이가 사라진 일로 남아 버린 것을. 이름을 함부로 붙이지 않았다면, 애정을 담아 부르지 않았다면 짧게 털어낼 수 있었을까. 노랑이를 보낸 슬픔을 안고 며칠을 까망이와 얼룩이를 찾아 동네를 돌아다녔다. 이름은 정이다. 떠날 것들에게 정을 붙이고 부르던 대가는 가혹했다.




C는 나보다 네댓 살이 어렸다. 남들은 예쁘다고 극찬하는 내 이름을, 야속하게도 내 나이의 위치가 몇 계단이나 위에 있는 탓에 불릴 일이 없었다. 간혹 장난스럽게 내 이름을 한두 번 부른 적은 있지만, 보통은 여느 나이 어린 남자의 동생들이 사용하는 ‘누나’란 호칭으로 불렀다. 하지만 나는 용건이 없어도, 별 이유 없이 C의 이름을 자주 부르곤 했다. 사랑은 술과 같다. 누구든 주량을 넘긴 사랑에 취하면 흔하게 하는 착각 때문이다. 영영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정을 붙이고 싶어서. 입술에 이름을 붙이는 만큼 정이 흠뻑 붙었다.


C가 내게 ‘정’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던 날, 나는 우습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C가 나를 내 이름으로 더 많이 불러줬다면, 그래서 내가 정으로서 떼기 어렵게 붙어있었다면 이 끝이 유예되었을까. 내가 C의 이름을 조금 덜 불렀다면, 이 상실감을 떼어내기 더 쉬웠을까. 까망이와 얼룩이, 그리고 노랑이가 떠올랐다.


지금은 C의 작고 붉은 물고기에게 이름이 생겼을지 문득 궁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