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적확히’ 쓴다는 건 뭘까.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정확한 표현은 무엇인가. 날선 인식. 날선 인식은 무엇인가. 일상을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캐치해내는 것. 매우 또렷한 해상도로 출력해내는 것.
‘일간 이슬아’가 메일링을 할 당시, 구독한 나에게 칭찬해주고 싶다. 덕분에 내 메일함에는 ‘일간 이슬아 2019~’라는 폴더가 있고 그의 글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나는 스토리를 진행하는데 답답함을 느끼거나 어떤 스토리의 경외심을 느끼면 ‘일간 이슬아’를 뒤적여본다.
메일함의 ‘일간 이슬아 2019~’ 폴더에는 뭔가 잔뜩 있다. 백여개의 글이 있고, 스토리가 있고 시퀀스가 있고 플롯이 있다.
어딘이 말했다. 모든 글은 스토리라고. 나는 에세이가 읽기 쉬워서 쓰기도 쉽다고 생각했던 것을 고쳐먹었다. 다시 읽는 이슬아 에세이는 매번 놀라웠다. 이런 스토리, 이런 유머,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표현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배치한 유연함.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즐비했다.
김은희 작가가 말했다. 어떤 장르던 작가의 입장에서 다시 고칠부분을 생각한다고. 나는 ‘일간 이슬아’를 읽으면서 고쳐야 할 부분이 전혀 없었다. 아주 잘 쓴 글이었다.
이걸 매일 한 달동안 연재했다니. 아아, 이슬아 작가는 웹소설 작가보다 더한 중노동을 했다! 그래서 작가님의 주변사람들이 글쓰는 기계인것 처럼 말했구나…
일단 기계가 되자!(이렇게 생각하는 것 맞을까…) 기계가 되면 작가가 되겠지, 라는 마음가짐을 가져보고… 그를 여러번 다시 읽는다.
꽃나무 아래를 홀로 걷다가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는 벌써 일흔 몇 번 째로 벚꽃의 계절을 지나치고 있을 것이다. 비슷한 시절에 태어난 수많은 여자들처럼 내 할머니들의 이름 역시 ‘자(子)’로 끝난다. 1945년에 태어난 향자 씨와 1948년에 태어난 존자 씨. 둘 중 존자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향자 씨는 분명 꽃길 걸을 시간이 있었을 테지만 존자 씨는 여전히 억척스레 청소 일 다니고 살림 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을지도 몰랐다. 봄을 뒤로 둔 채 빠르게 읍내의 골목길을 걸어다닐 존자 씨를 상상하다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들도 마구 떠올라 나는 길에서 소리 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