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좋은 사람인가

내가 살아남는 법

by 이서연

나는 엄마의 폭언을 견디며 자랐다. 엄마가 말한 대로 되지 않기 위해 애썼고, 그것만이 내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영화관 건물 내 식당에서 시급 2,000원으로 시작해, 고깃집과 프랜차이즈 버거집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그때 알았다.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보다 대기업 프랜차이즈에서 일하는 게 훨씬 나았다는 걸.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기업 위주의 취업처를 찾았고, 결국 한 기업의 자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성과 중심의 회사. 나처럼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사람에겐 오히려 즐거운 곳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도 있었다. 고졸 공채와 대졸 공채는 애초부터 출발선이 달랐다. 아무리 성과를 내도 넘을 수 없는 ‘대학’이라는 산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쉬는 날도 없이 일하며 버텼고, 그렇게 7년을 보냈다. 결국 그 산 앞에서, 나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퇴사 후 친척이 운영하는 카페의 점장으로 일하던 중 남편을 만났다. 연애 중 예상치 못한 임신, 그리고 결혼. 가진 건 없었다. 나는 ‘0원’이었고, 남편은 2천만 원이 전부였다. 서로 도와줄 가족도 없었다. 그 돈으로 전셋집을 얻어 시작한 결혼 생활. 임신한 몸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만삭이 될 때까지 일했다. 그리고 첫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나는 맹세했다. “이 아이만큼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

좋은 일도 있었다. 우연히 한 면세점 사이트의 글 응모에서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로 쓴 글이 2등에 당첨돼 300만 원 상당의 여행 상품권을 받았다. 우리는 그걸로 괌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고, 시부모님과는 제주도도 함께했다. 이후 소형 아파트로 이사하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행복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남편의 외벌이로는 부족했다. 나는 재취업을 고민하며, 동시에 공부를 시작했다. 전공은 아동학. 내 아이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고, 세상 어딘가 있을 또 다른 나 같은 아이에게 따뜻한 보육교사가 되어주고 싶었다.

공부와 육아, 일의 병행은 쉽지 않았지만 시부모님의 따뜻한 도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시부모님은 금전적인 지원은 어렵지만 손주 돌보는 일엔 늘 최선을 다해주셨다. 그 안에서 나는 안정감을 얻었고, 처음으로 ‘편안함’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감사한 나날이었다. 고단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이렇게 안온한 일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웠다. 주 5일 근무하며 주말엔 아이에게 집중했고, 틈틈이 공부해 장학금을 받으며 4년제 학위를 마쳤다. 남편과 함께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고, 우리는 2천만 원에서 시작한 삶을 조금씩 바꿔갔다.

더 큰 용기가 생겼다. 육아휴직 후 실내 놀이터 형태의 공간을 인수했다. 감염병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곧 지나가리라 믿었지만, 상황은 나빠졌고 나는 다시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 돌봄도, 가게 운영도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럼에도 행복했다. 내 아이, 내 남편, 내 공간. 손님이 하나둘 늘고, 가게가 살아나는 것을 보며 감사한 마음으로 아동후원과 보호시설 기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 내부에 새로운 점포가 입점했다. 그들과의 마찰이 시작됐다.

신발장을 철거해 달라는 요구,

바닥 매트에 대한 시비, 감정 섞인 말들.

출산한 지 얼마 안 되니 3개월만 기다려달란 말에
“출산한 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화장실 문 열려 있으면 영업 방해예요.”
“사장님 가게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저희 장사가 안 돼요.”

싸워도 보고, 달래도 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제왕절개 수술 후 조리원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산후도우미 없이 다섯 날을 홀로 보내야 했다. 난소 낭종이 출산 후 한 달 만에 10cm로 커져 복강경 수술을 받았고, 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 둘째를 돌봐야 했다.

그때 내 인생이 참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정말 박복하다’는 말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기댈 수 있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서러웠다. 하지만 아이는 예뻤다. 모성애는 그런 순간에도 나를 붙잡아 주었다.

산후우울증은 천천히 찾아왔지만, 그마저도 버틸 틈이 없었다. 나는 가게를 지켜야 했고, 그들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2년의 계약이 끝나고 그들은 떠났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포털 사이트에 익명으로 남겨진 한 줄의 리뷰. “이곳은 정말 최악이다.”
단 한 줄이었지만, 나는 또 무너졌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작성자를 추적했고, 결국 해당 점포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정황이 드러났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 사건은 종결되었다. 억울했지만, 아이들과 가정을 지켜야 했기에 나는 또 넘기기로 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내 안의 어두운 감정이 나를, 가족을 잠식하지 않도록 마음을 바꿨다. "그들도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거야", "나만 겪은 건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남았다.

나는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다. 누군가 나를 괴롭히거나 비난하면, 스스로 이유를 찾아줬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버텼다.

그리고, 결국 나는 보육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기에,

남편에게 가게를 맡기고 둘째를 데리고 어린이집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리디 어린 둘째 아이의 변화.
나는 또 한 번,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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