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주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지나 청소년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은 다른 집들과는 달랐다.
여섯 살 무렵까지는 유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엄마의 사치, 아빠의 사업 실패, 그리고 다단계까지 엮이며 집에는 빨간 딱지가 여러 번 붙었고, 우리는 이사를 반복했다.
나의 가정사를 이야기해보자면,
아빠는 술주정이 심한 사람이었다.
소위 ‘술만 안 마시면 좋은 사람’.
하지만 조용해질 만하면 술을 마셨고,
그러면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때리진 않았지만, 엄마를 때리고,
엄마가 아빠를 때리고, 서로 몸싸움이 이어지고 고성이 오갔다.
그 기억은 아직도 나에게 공포로 남아 있다.
엄마의 스트레스는 내게로 향했다.
엄마는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손을 날렸고,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엄마 인생을 망친 ×”가 되었다.
나는 자주 집에 혼자 남겨졌고,
엄마는 동생과 함께 외출하곤 했다.
물욕이 많고 귀가 얇았던 엄마는 전집을 포함해 이것저것을 마구 사들였다.
집엔 필요 없는 물건들이 늘어갔고,
그 혼란스러운 공간 한가운데엔 늘 내가 있었다.
그나마 책들만은 내게 피난처가 되어주었고,
나는 그 책들을 읽으며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엄마와 아빠에게 함께 일하며, 살자고 했고, 우리는 외할머니가
운영하던 가게 위층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나는 여전히 천덕꾸러기였다.
할머니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예쁜 사촌들과의 비교 대상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결국 아빠의
술 문제로 또 다시 쫓겨났다.
그렇게 아빠는 객지로 떠났고,
엄마는 할머니 집과 우리 집을 오가며 점점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동생과 단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사실상 둘만 살았다.
밥은 학교 급식이 전부였다.
아니면 학교에서 군것질을 했다.
어떻게 그런 나날을 살아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조용히, 묵묵히.
시간은 조용히, 묵묵하게 흘렀으니까.
엄마는 나에게 유독 인색한 사람이었다.
사랑도, 금전적인 지원도.
동생에게는 쉽게 주던 것들이 나에겐 언제나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동생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매일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엄마와 동생은 한편이었다.
엄마와 동생이 함께 나를 공격하던 날들
나는 언제나 집에서도 혼자였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엄마와 동생과 함께 뮤지컬을 본 적이 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두운 공연장에서 갑작스러운 소리와 조명이 무서워 엄마 손을 잡았던 장면만은 뚜렷하다.
“얘가 왜 이래.”
엄마는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동생을 꼭 안아줬다.
그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이상하게 안 잊히고 나의 기억 속 비디오로 남겨져 있다.
어렵거나 힘들 땐 자동 재생되는 비디오처럼.
그런 기억들은 참 많다.
어느 날은 동생이 내 물건을 손대 다툼이 생겼고, 서로를 꼬집고 때리다 엄마가 내 머리채를 잡고 욕을 퍼부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 옆에 있던 미닫이 나무문을 쳤는데 문에 박힌 유리가 와장창 깨지며 손을 스쳤고, 피가 철철 흘렀다.
휴지로 손을 닦으며
“피가 너무 많이 나지금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했더니,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응급실 가면 돈 많이 나가니까,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병원 가.”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다.
어린 시절의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었고,
사랑을 주는 법도 몰랐다.
살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엄마와 동생에게 지지 않으려 애쓰는 아이였다.
내 생일에 대한 따뜻한 기억은 없다.
제대로 챙겨 받은 적이 없었기에.
하지만 ‘최악의 생일’은 또렷이 남아 있다.
중학교 2학년.
친구가 생일 선물을 주며 “오늘 놀자”고 했다.
고마웠고, 나도 보답하고 싶었다.
엄마가 있는 가게에 가서 조심스럽게 용돈을 부탁했다.
적어도 오늘은 생일인데,
엄마라면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조금은 설레었고, 기대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쌍욕이었다.
“오늘 생일이라 친구랑 놀고 싶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그래서 어쩌라고. 나가.”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오기가 생겨
“돈 줄 때까지 안 나갈 거야”라고 버텼다.
밖에는 여전히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경찰에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경찰이 왔다.
“따님이라면서요?”
그 경찰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울면서 “나갈게요.”
그리고 친구에게 “미안해”라고 했다.
친구는 모른 척하며 “다음에 재밌게 놀자”고 위로해주었다.
그냥,
최악의 날이었다.
최악 중의 최악.
그날 이후, 나는 엄마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다.
엄마가 나에게 “몸이나 팔고 다닐 년”이라 욕해도,
나를 볼 때마다 증오 어린 눈빛으로 욕을 해대도,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은 사주고 나는 안 사준다며 운다는 이유로 차로 30분 거리인 번화가에 나를 내려놓고 가버려도.
그날까지도
엄마에 대한 마음을 잡고 있던 내가
정말로, 기대를 버렸다.
그 수많은 어린 날들 속에서
나는 엄마에게도,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은
천천히, 조용히 완성되어 갔다.
내가 어려서.
내가 뛰어나지 못해서.
내가 얌전하지 못해서.
내가 모자라서.
내가 태어날 때 엄마를 죽일 뻔해서…
수많은 이유 중,
엄마가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유를
이젠 그날 이후 찾지 않기로 했다.
동생은 그냥 예쁜 아이였고,
나는 늘 욕받이였다. 분노의 대상이었다.
동생은 뱃속에서부터 순했고,
그래서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도 결론 내렸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이유가 없구나.”
그래서였을까.
나는 가족의 사랑이란
TV 속 이야기나 소설 속 이야기인 줄 알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애써 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이상하다고 느끼고 싶지 않았고,
슬퍼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척을 했다.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는 아이인 척.
따뜻한 밥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인 척.
티가 나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평범한 척을 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
따뜻한 밥을 먹던 날,
친구 엄마가 맛있는 반찬을
자연스럽게 친구에게만 몰아주는 걸 보았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그날, 불청객이었다.
왜인지 그 장면은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쌓인 기억들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다.
나는 그 기억들을 양분 삼아
평범해 보이는 법을 익혔고,
스스로를 그렇게 포장하는 법을 배웠다.
아니, 그렇게 보일 거라 믿었다.
그리고 나는 자라면서도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널 낳은 엄마조차 널 싫어했는데,
누가 널 좋아해줄까.”
“사랑받으려면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해.”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센 척해야 해.”
“평범해 보여야 해.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아.”
그 상처들은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하지만 끈질기게 속삭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무시당하지 않으려
백조처럼,
물속에서 쉼 없이 발버둥 치고 있다.
남들처럼
아이를 낳고 나면 엄마가 이해된다는데
나는 달랐다.
아이를 낳고 보니
엄마가 더 미워졌다.
증오가 더 깊어졌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그렇게까지 안간힘을 써서
미워하고, 화를 쏟아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나라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