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왔으니 이제 새로 맞이한 자유를 느긋하게 만끽해도 될 터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허송세월하며 보내는 꼴을 못 봤다. 운동을 시작하고, 평생교육 강좌를 듣고, 여행을 가고, 책을 읽고, 지인들을 만나고 어떻게든 바삐 지내는 모습이다.
저질 체력이라서 퇴근 후엔 초저녁부터 소파에 잠시 누웠다가 잠시 기절(이라 쓰고 쪽잠이라고 읽는다.)하기 일쑤였던 나도 일을 그만두고 나선 지난 몇 년간의 무기력을 탈피한 것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끌리는 대로, 당기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왔다.
그중에 제일 꾸준히 한 것은 영어회화 어플을 이용한 영어공부였다.
원래는 원어민 화상통화로 영어회화를 배우고 싶었는데 원어민 선생님의 일정을 맞춰야 한다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고, 비루한 영어실력으로 갑작스럽게 대화를 한다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요즘은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이용해서도 영어공부할 수 있는 소스가 많기에 1) 무료로 2) 가볍게 3) 부담 없이 시작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태생이 게으름뱅이인 내가 그런 강제 없는 자율을 누릴 자격이 어디 있겠나.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내가 무료로 영어공부를 한다면 어느 순간 넥플릭스로 드라마나 보고 유튜브 숏츠나 보면서 시간이나 죽이겠다 싶었다.
어떻게 이뤄낸 퇴직인데.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순 없지.
인터넷 광고로 알게 되어 연말에 일주일 무료체험을 했던 영어회화 어플(AI튜터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엄청 광고를 때려댐. 그 광고에 제대로 낚인 1인)을 연간 결제를 해버렸다. 1년에 24만 원. 한 달로 치면 2만 원인 셈이다.
월급쟁이에서 백수로 전락한 나에게 24만 원은 큰돈이었지만, 원어민 화상통화는 그보다 더 비싸고, 나처럼 게으른 짠순이에게 돈으로 강제하는 것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에 기꺼이 값을 치렀다.
아주 쉬운 왕초보 단계부터 기초, 중급, 고급순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있어서 처음 영어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왕초보 단계부터 시작했고 가끔씩 AI튜터와도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AI인걸 뻔히 아는데도 처음 할 때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계속 리셋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래놓고 원어민 선생님이랑 대화를 하겠다고? 심지어 화상으로? ;;;)
이 어플의 장점 중 하나라면, 승부욕의 화신인 나를 조련하는 출석체크 기능이 있다.
매일 수업을 들을 때마다 ‘불꽃’이란 이름으로 연속된 수업일수를 체킹 해준다.
불꽃이라니. 꺼트릴 수 없지. 내 한 몸 바쳐 불꽃을 사수하리라.
2023년 1월 2일.
면직일 다음날부터 시작된 나의 영어공부는 오늘까지 119일간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지켜왔다. 아니, 해왔다.
영어실력? 그건 잘 모르겠고, 무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해서 불꽃을 활활 태워왔다.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영어공부를 하는 건지, 영어공부를 하려고 불꽃을 피우고 있는지 헷갈림)
불꽃이 100일이 지속되었을 때 초4학년 아들에게 신이 나서 자랑했다.
엄마가 100일을 채웠어!!! 대단하지 않니? 엄청 대단하지?
대답 안 해주면 엄마의 호들갑이 안 끝날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아들이 엄지를 치켜들며 칭찬을 쏟아냈다.
“엄마 진짜 대단해.”
“에이. 이거 갖고 뭘~. 그래도 엄마가 쫌 성실하다. 그치?”
“100일이라니. 진짜 짱이야. 엄마.”
“내가 또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안 되겠어. 너무 잘해서 상장 만들어줘야겠어.”
“응? (굳이…?) 상장?”
아이가 방에 들어가 부스럭거리더니 이내 종이 한 장을 팔랑이며 들고 와서는 나보고 자기 앞에 서란다.
아드님이 시키시면 또 시키는 대로 해야지. 사뭇 진지하게 아이 앞에 섰다.
상장 스픽상
5동 000호 김유난
위 사람은 스픽 100일을 달성하였으므로 이 상장을 수여함
2023.4.14. 금 5동 000호 육군사령총장부
(네? 누구라고요?)
한참 강철부대에 빠져있던 아이가 군부대를 하나 만들어냈나 보다. 육군사령총장부라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무튼 자기가 받았던 상장을 참고하여 그럴싸하게(근데 동호수가 왜 거기서 나와..?) 만든 상장을 나에게 건넸고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고개 숙여 그걸 받았다.
아이는 나에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200일 채우면 상장 2개를 주겠다.‘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