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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Jun 12. 2023

항암제 복용 5일 만에 간성혼수 상태가 되었다.

간성혼수 환자의 의식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

종합병원의 응급실은 말 그대로 응급한 환자들로 넘쳐났다. 우리 아빠 같은 암 중증환자, 사고를 당해 들어온 외상환자, 싸우다가 다쳐서 들어온 골절환자, 의식을 잃은 환자.... 응급환자들이 너무 많았는데 그들의 보호자 각 1명씩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어서 응급실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환자 베드는 아빠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떨어질 수 있을 만큼 좁아서 양쪽 가드를 다 올려야 했고, 베드 사이에 보호자가 앉아있는데 어느 쪽 베드의 보호자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이쪽이든 저쪽이든 베드 사이가 협소했다.


여기 좀 와주세요.

급해요.

여기부터 봐주세요.

아까 왔어요.

한참 기다렸어요.

의식이 없어요.


다들 하나같이 의료진을 부르는 소리로 응급실은 시끌벅적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젊은 남자 환자는 2시간을 기다렸는데 아무도 와보지 않았다면서 누운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와이프로 보이는 여자는 간호사 데스크에 가서 따졌다. 남자는 열을 내며 다른 병원에 가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나가버렸다. 


여기 안 급한 환자 없어요. 제발 조용히 좀 해주세요. 

속으로만 생각했다. 

우선은 응급실에 들어와서 베드 하나를 차지하고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처치를 받지 못하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응급실 담당 의사가 와서 보더니 아빠가 간성혼수인 것 같다고 인턴쌤이 관장을 해줄 거라고 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고 아빠의 의식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헛소리를 하고 눈이 풀리며 몸이 자꾸 늘어지고 처졌다. 


*간성 혼수: 정식 명칭은 간성 뇌증
우리 몸에서 단백질이 분해되어 생긴 암모니아를 간에서 요소로 바꿔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하는데 간이 제 역할을 못해서 암모니아가 몸속에 그대로 남아 혈관을 타고 뇌에 영향을 미치거나 대장 내의 대변을 통해 간성혼수를 유발함.


응급실 내원한 지 4시간 만에 복수천자를 먼저 하게 되었다. 간경화나 간암환자들이 복수가 차면 임산부처럼 배가 딴딴하게 부풀어 오르고 호흡이 불편하고 힘들어진다. 뭐든지 우선 해야 했다. 아니, 의사가 와서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그냥 아빠의 몸을 맡길 뿐이었다. 배에 굵은 바늘을 꽂으니 의식이 몽롱한 아빠는 자꾸 주사를 뽑으려고 했다. 나는 '이거 해야한다.'고 계속 반복해서 말하며, 일어나려는 아빠를 계속 눕혔다. 그 사이 피검사도 했다. 복수천자 하는 사이에 관장을 맡은 인턴이 왔는데 복수천자 중이라 지금은 관장을 못한단다. 우리 아빠보다 응급실에 늦게 들어온 간성혼수 환자가 관장을 시작했다. 


복수천자를 하는데 의사가 3병을 채우라 했다.


응급실에는 보호자 1명만 출입이 가능해서 엄마와 중간중간 교대하며 간단히 끼니도 때우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했다. 잠시 뒤 아빠의 관장을 하기로 했는데 엄마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는 중증근무력증을 앓고 있어서 긴장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근력 약화 증상이 나타나서 팔다리에 힘이 빠지곤 했다. 관장할 때 보호자가 환자가 변을 잘 참을 수 있도록 꽉 붙잡아야 한다고 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간성혼수의 경우, 환자의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수차례의 관장이 필요하다고 해서 첫 번째 관장은 우선 내가 하기로 했다.


아이를 키우며 내 손에 똥오줌 묻혀가며 기저귀도 갈아주고 닦아주고 했지만 아이와 아빠는 다르지 않은가.

마음이 복잡하고 조금은 긴장되었지만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아빠가 관장을 잘해서 장에 있는 변이 잘 나와서 몸 안에 있는 독소와 암모니아가 빠져서 의식이 돌아와야 한다는 것. 


관장은 응급실 베드에서 그대로 진행됐다. 얇디얇은 커튼 하나치고 그마저도 옆에 누가 지나가면 펄럭일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관장을 했다. 인턴쌤이 와서 베드에 방수 패드를 깔고 내 눈에는 굵은 빨대보다 커 보이는 튜브를 항문에 집어넣고 엄청 큰 주사기에 들어있던 관장약을 다 밀어 넣었다. 인턴쌤은 관장 머신 같았다. 방수 패드를 깔고 튜브와 주사를 연결하고 항문에 넣고 약을 주입하고 다시 빼서 폐기물통에 버리고 거즈를 왕창 뭉쳐서 내 손에 쥐어주며 그곳에 그 거즈를 갖다 대는 시범을 보이더니 그대로 꽉 붙들어 매고 있으라고 하고는 -그 과정에 어떠한 군더더기도 없었다.- 자리를 떠났다. 


관장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것인지는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안다. 의식이 온전할 때도 얼마나 식은땀이 나고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지, 얼마 못 참고 화장실을 가버리면 생각했던 것만큼 큰 효과를 보기도 어려워서 정말 온 우주의 기운을 다 모아서 참아야 하는데 의식이 온전치 못한 아빠에게 그런 참을성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관장이 얼마나 잘 되는지는 순전히 나의 몫이었다.


팔에 힘을 너무 꽉 줘서 어깨부터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 쫌만 참아봐.


나는 그저 아빠의 관장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루종일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벌벌 떨며 긴장했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으로 정신은 또렷했고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나도 더럽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첫 번째 관장을 하고 나서 엄마와 교대를 하고 밤 10시 반쯤 집에 돌아왔다. 아빠는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관장을 3번을 더하고 의식이 조금 돌아왔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의식이 조금이라도 돌아온 것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의 아빠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제목 사진 출처: Paul Brenna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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