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순례길에서 먹은 삼겹살은 민폐였을까
1편: 우리가 순례길에서 먹은 삼겹살은 민폐였을까
2편: 어제의 순례자와 내일의 순례자가 만나는 하나의 소통 방법, 낙서
3편: 순례길은 개인으로 걷는 길, 집단화된 비난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순례자로
순례길에는 완벽히 적응했고 남은 일정은 빡세게 걸어보자고 마음먹은 28일 차에, 자주 꿀팁을 전수받던 '순례길 카톡 오픈 채팅방'에 난리가 났더랬습니다.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을 저격한 뉴스 때문입니다.
구글에 '순례길 한국인'이라고 검색을 하면 나오는 기사들의 제목들이 꽤나 자극적입니다. '스페인 '순례자의 길' 삼겹살 굽고 한글 낙서까지', '수십 명 삼겹살 굽고 소주 순례길에선 한국인 끔찍'. 이런 이야기는 순례길이 아니라 다른 관광지에서도 늘 논란이 되곤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 카톡방에서는 의아해하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억울해하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실제로 순례길을 걸어보면 사정이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기사가 한국에서 꽤 화제가 됐었는지 저에게도 순례길의 한국인에 대해서 물어보시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저희 부부가 느끼기에는 한국인이라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특별히 다르다는 생각이 안들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인을 기피한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고, 또 그런 한국인들을 실제로 본 적도 없거든요.
순례길에서 묵는 숙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게 알베르게(Albergue)라고 하는 순례자 숙소입니다.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호텔도 있고요, 대도시에서는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알베르게는 순례길에만 있는 독특한 형태의 숙소입니다. 호스텔과 형태는 유사하지만, 순례자 협회에서 운영하는 공립 알베르게는 순례자 여권을 가지고 있는 순례자들만 이용할 수 있고, 성당 같은 곳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렴한 가격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곳이 많습니다.
삼겹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알베르게가 주방을 공용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알베르게에 따라서 주방의 크기나 시설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대부분 4구짜리 인덕션 1~2개가 전부입니다. 사람들이 주방에 몰리는 날은 혼돈의 카오스가 되기도 해요. 그래서 알베르게의 주방은 다른 순례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조금 더 생생한 순례길의 주방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이번 글에서는 저희가 직접 삼겹살을 구워 먹은 후기를 전해드립니다. (헉, 진짜 순례길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은 거야?!)
저희 부부가 처음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은 곳은 '로그로뇨'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머무를 때였어요. 한 방에 10명 정도가 같이 자는데 마침 우리 2층 침대 바로 옆 침대에 한국인이 오셨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 알베르게의 주방시설이 좋다는 말에 같이 삼겹살을 먹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례길에 오기 전에 이미 순례길에서 삼겹살을 먹는 게 민폐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조금 걱정되긴 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3명이서 400g은 한참 모자라다면서 200g을 더 사더라고요.(그것도 모자랐습니다)
순례자들이 조금 적을 시간인 5시쯤, 고기를 굽기 시작합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고기를 굽게 되었는데, 최대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환풍기를 최대로 켰고 기름이 튀지 않게 뚜껑으로 잘 막으면서 구웠습니다. 굽는 동시에 아내는 주변에 튄 기름이 계속 닦으면서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했어요.
그런데 삼겹살을 굽기 시작하니까 주방에서 이야기하면서 쉬고 있던 사람들 몇 명이 나가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삼겹살 때문에 나간 건지 다른 일 때문에 나간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순간 고기 굽는 손이 멈칫하고 등줄기에 땀이 쓱 흐르면서 눈에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와 함께 식사한 다른 분은 삼겹살에 들떠있더라고요. 저는 고기를 후다닥 구워버리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삼겹살을 먹는 건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걱정돼서요. 그래도 시간이 조금 흐르니 연기도 전부 빠지고 부엌이 평소 모습을 되찾습니다.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되니 삼겹살의 맛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사실 모두가 다 아는 그 맛. 순례길에 지친 몸과 마음을 한껏 녹여줄 기름과 살코기의 완벽한 조화.
식사를 다 마치고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은 별 신경을 안 씁니다. 혼자서 지레 겁먹고 졸아있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요리를 하면 연기가 나거나 냄새가 나거나 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말이죠.
그다음에 고기를 구워 먹은 곳은 '까스트로헤리츠'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였습니다. 수용인원이 8명 정도인 정말 작은 알베르게였는데, 주방 바로 옆이 잠자는 방이라서 환기에 엄청 신경 쓰면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한창 굽고 있을 때, 숙소 주인이 주방에 들어와서 무슨 요리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혹시나 문제가 된 걸까 봐 조마조마했죠.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만드는 중이라고 대답했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엄청 의외였습니다. 제대로 된 요리를 한다고 칭찬을 하면서 엄청 맛있어 보인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먹자고 하니까 너무 좋다면서 와인을 들고 오셨어요. 식사 중에 영국 아저씨도 합류해서 거의 3시간가량을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보냈어요. 정말 이제는 자러 가야겠다고 할 때까지 놀았죠.
우리가 구웠던 마지막 삼겹살은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라는 작은 도시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였습니다. 이번에도 조금 이른 시간에 주방으로 갔더니, 이미 스페인 단체 관광객들이 요리를 하고 있었어요. 셰프가 한 명 있었는지, 고기와 해산물을 굽고는 정체불명의 요리와 빠에야를 만들더라고요.(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셰프였어요)
거기 인덕션이 4구 밖에 없었는데 이미 전부를 쓰고 있었어요. 우리가 부엌으로 들어가니까 금방 요리가 끝난다고 미안하다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하더라고요. 우리도 흔쾌히 괜찮다고 하고는 스페인 셰프의 요리를 구경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인덕션 1구 빼주길래 우리도 요리를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 그 셰프가 우리 고기를 보더니 그릴에 구우면 엄청 좋다면서 옆에 있던 그릴에 올리브유도 발라줍니다. 우리가 요리 구경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봤던 게 좋았던지 요리를 조금 나눠주기도 했어요.
삼겹살을 유럽에서도 구워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인의 눈에 삼겹살은 그저 하나의 요리 재료일 뿐입니다. 한국사람에게는 스페인에서 가장 손쉽게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간편 요리 이기도 하지요. 기름을 두르고 팬에 굽기만 하면 되니까요.
우리의 몇 번의 경험이 전체를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삼겹살 자체가 문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방을 사용할 때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지입니다. 유독 삼겹살이 자주 언론의 기사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기름이 많이 튀고 냄새가 많이 나서 일 텐데요. 물론 저희도 항상 삼겹살을 먹을 때는 환기시설이 잘 되어있는지 확인했고, 최대한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을 이용했어요.
순례길은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만큼, 다양한 문화와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곳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나와 다른 문화에 열려있고 또 궁금해하죠. 주방에서는 서로의 요리 방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주로 먹는 음식재료들이 이야기의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삼겹살은 돼지고기의 부위라서 한국의 대표 요리라고 말하기엔 조금 애매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요리잖아요. 지치고 힘든 순례길에서 다시 걸을 힘을 얻기에 한국 음식만큼 좋은 게 없죠. 환기에 신경 쓰고 기름 튀는 것만 조금 조심하면 한번 시도해보셔도 괜찮습니다. 큰 도시의 중국인 마트에서 가끔 구할 수 있는 쌈장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삼겹살 쌈 하나 싸서 코리안 스타일 비비큐라고 외국인 친구들에게 소개해 줄 수도 있겠죠. 분명 다 좋아해 줄 겁니다. 삼겹살은 사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