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행 비행기 티켓을 지르게 만들 산티아고 순례길 사진 에세이
글 쓰는 오늘, 2019. 11. 25.(금) 베를린.
오늘은 템펠호프 공항의 활주로를 달렸습니다. 활주로에서 달리기라니, 의아하실 텐데요.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은 1930년대 중반 나치 정부에 의해 증축되었고, 2008년 폐쇄되었습니다. 지금은 공원으로 개방되어 시민들의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죠. 대략 2km 정도 되는 활주로를 달린다고 상상해보셨나요? 베를린에서는 거의 매일 조깅을 하고 있지만, 오늘의 달리기는 그 길이 활주로였다는 점에서 조금 특별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매일 같은 길을 걸었지만, 기억에 남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기억에 남는 그 순간들을 사진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해발고도 1310m인 오세브레이로로 가는 길은 순례길을 완주하기 전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산길입니다. 20일 넘게 걸으면서 자신감이 붙은 저희부부였지만, 이 날은 정말 힘들었어요. 30km를 걸어야 하는 일정에다 마지막 10km 정도가 경사진 산길이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나무 그늘이 거의 없습니다. 스페인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나무 그늘에만 가도 시원한데 말이죠. 이 길에서 발견한 나무 그늘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달콤합니다.
나바레떼(Navarrete)에서 나헤라(Najera)까지 가는 16km 루트. 이 길은 중간에 마을이 없는 길입니다. 날씨는 너무 좋았지만, 16km를 쉬는 마을 없이 걷는 것은 꽤나 힘든 일입니다. 아내는 도중에 그냥 누워버리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는 찰나에, 아내는 감탄을 하며 저 보고도 누워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옆에 걷는 순례자들 때문에 주저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웠더니, 온 하늘이 품에 들어오는 듯합니다. 아니, 제가 하늘 속에 푹 빠졌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네요. 정말 넓은 하늘이었거든요. 하늘에 날아다니는 비행기만 5대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마을들 중에서도, 도착이 가장 기뻤던 마을을 꼽으라면 에스떼야입니다. 엄청 오랜 시간을 걸었기 때문인데요, 26km를 걷는데 무려 12시간이 걸렸습니다. 저희 부부의 평균 시속이 4km임을 생각하면, 엄청 오래 걸린 거죠. 나중에 비 오면 사자고 비옷을 사지 않고 미뤄온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비에 2시간을 처마 아래에서 기다렸죠. 비가 좀 잦아든 후에야 마을로 들어가 비옷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지체된 시간 때문에 버스 탈까도 엄청 고민했지만, 계속 걷기로 합니다.
비가 내리던 오전과 다르게, 오후에는 또 갑자기 날이 맑아졌습니다. 반가운 햇빛 때문인지, 지나는 길과 마을들이 그 날 따라 더 예뻐 보였죠.(지나가는 개미까지 구경한 날) 덕분에 시간이 엄청 지체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시간은 다리도 물론 아팠지만 정말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아내와 도착할 때까지 먹고 싶은 음식들 이름을 대며 걸었죠.(한 시간 내내 먹고 싶은 음식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왔다는 놀라운 전설이..) 정말 배고파서 더 이상은 못 걷겠다 하는 바로 그 순간, 마을에 도착했다는 표시판 옆으로 무지개가 보입니다. 성경에는 무지개가 언약의 상징으로 나오는데요, 포기하지 않고 걸은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일까요?
순례길에서는 보통 저녁을 간단하게 만들어 먹는 편입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을 차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틱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할아버지가 있네요. 결혼기념일이라도 되는 걸까요? 여러 명이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는 알베르게는 분명 휴양지의 멋진 호텔만큼 멋지거나 편하진 않겠지요. 그래도 촛불 두 개로 애틋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지치고 힘든 순례길에서도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오세브레이로를 넘어 갈리시아 지방으로 넘어오면, 꽤 많은 것들이 변하는데요. 지붕 색도 남색으로 바뀌고, 갈리시아의 전통적인 건축물인 '빠요사'라는 곡물창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음식 메뉴도 달라집니다.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해산물이 유명하거든요.
갈리시아임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요. 바로 소똥 냄새입니다. 소똥 냄새야 순례길 군데군데서 맡을 수 있지만,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유독 많이 납니다. 목축업이 위주인 마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이동하는 소떼에 막혀 교통체증이 발생하기도 하죠. 씨에스타(스페인의 낮잠시간)를 즐기는 스페인의 여유를 배웠는지 소들의 걸음은 느긋하기만 합니다.
순례길 곳곳에는 순례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길 위에 흔적을 남기곤 합니다. 순례길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사진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글이나 그림을 적어 놓기도 합니다. 흔적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돌을 세우는 것입니다. 펜이나 사진 같은 사전 준비물도 필요 없습니다. 길 위의 돌 하나를 바로 주워서 세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순례길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인 철의 십자가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 있습니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순례자들은 자신이 이때껏 저지른 죄의 무게와 같은 크기의 돌을 이 곳으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돌과 함께 그 죄를 십자가 옆에 내려놓습니다. 아마 산티아고로 들어가기 전 이 곳에서 마음속 짐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아프고, 슬펐을까요. 이 곳에는 순례자들이 가져온 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십자가 주변으로 돌들이 언덕을 이루고 있죠. 이 곳의 돌 하나하나에 남겨진 순례자들의 고민과 번뇌를 생각하면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돌의 무게가 마찬가지로 무겁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내도 이곳에 돌 하나씩 올려 두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도합니다.
저희 부부가 순례길을 걸은 것은 9월과 10월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여름꽃인 해바라기는 이때쯤이면 시들어 노란 빛깔을 잃어버립니다. 처음 이 해바라기를 봤을 때는 '뭐 이런 흉물스러운 것들이 있어'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느다란 줄기에 큰 꽃잎 때문에(그 마저도 까맣게 시들어버린) 고개를 땅으로 축 늘어뜨린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자욱한 안갯속 정적만 흐르던 아침, 언덕에서 본 해바라기 밭은 제 생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시든 해바라기의 그 음침한 모양새가 안개와 묘하게 어울리며,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순례길에 파란 하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린 날도, 시든 꽃도 다 순례길의 일부이니까요.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던 순례길. 혹시나 저 시든 해바라기가 예뻐 보인다면, 순례길과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직접 느껴보세요. 직접 눈으로 모든 순간들을 한 컷, 한 컷 담으면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울 거예요. 사진을 보고 있으니 저도 다시 가고 싶어 지네요. 스페인행 비행기를 끊기 전에 이제 그만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지난 글처럼 차마 사진으로 제대로 담지 못해 아쉬운, 카스트로헤리츠의 별 사진으로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