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마트에 발을 들이는 순간, 독일의 육가공품, 프랑스의 디저트, 네덜란드의 다채로운 유제품처럼 각 나라만의 색다른 풍경에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개성 넘치는 유럽의 마트들 뒤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의 강력한 원칙이 숨어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실제로 유럽연합 (EU)은 모든 회원국의 식품에 대해 공통 법령을 두고 통합 관리합니다.
식품이 어떻게 표시되어야 하는지, 위생 기준은 무엇인지, 새로운 성분은 어떻게 승인 받아야 하는지 까지 모두 EU 식품법에 따라 결정되죠.
이 글에선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빵 한 조각, 영양 표시 하나에 담긴 유럽식 식품 법의 구조와 원칙을 쉽게 풀어보려고 해요.
단일시장과 자유이동 원칙
우리가 흔히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은 사실 몇개의 조직이 겹쳐있어요.
1) EU (Europian Union): 유럽연합, 정치·경제 통합 공동체 (27개국). 공동 입법, 단일 시장, 공동 정책
2) 셍겐지역 (Schengen Area): 국경 없는 이동, 여권 검사 없음. 국경 통제 완화가 핵심, 법령 통일은 아님 (ex. 스위스, 노르웨이 = EU: X, 셍겐: O / 아일랜드 = EU: O, 셍겐:X)
3) EEA (European Economic Area): EU + 노르웨이 +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경제 협력. EU 법령의 많은 부분을 따라야 하지만, 투표권은 없음. 단, 농업·수산 일부 분야는 자국 정책 따름
이 중 EU는 단일 시장(Single market: 모든 EU 국가의 시장을 하나로 보는 것) 이라는 원칙 아래 상품, 서비스, 자본, 사람의 이동을 자유롭게 보장하고 있어요.
이 때문에, EU 국가 내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날씨가 좋고 물가가 저렴한 포르투갈, 스페인으로 디지털 노마드를 하려 이동하는 경우나 이탈리아, 그리스 사람들이 인건비가 높게 책정된 네덜란드, 덴마크로 구직하여 이동하는 경우가 있죠. 비자가 따로 필요 없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이동도 쉬운 편입니다. 이것은 상품 (식품)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 아래 자란 올리브나 싱싱한 과일이 관세 없이 곧바로 독일이나 프랑스 마트 진열대에 오를 수 있고, 유럽 어디서든 거의 동등한 조건으로 유통될 수 있다는 거죠. 파리에서 맛보는 스페인산 하몽, 더블린에서 만나는 이탈리아산 치즈가 바로 이 단일 시장 원칙 덕분입니다.
관세가 없는데도 마트 가격은 정말 다릅니다.
예를 들어, 유럽인들의 주식인 식사빵 기준으로 보면, 네덜란드는 아무리 저렴해도 0.59유로 이상,
독일 & 포르투갈은 0.40대 부터 시작하는 빵도 있습니다. 대개 마트안의 물가 차이가 적게는 10센트에서 40~50센트까지 차이가 납니다. 단일 시장이라고 해놓고 왜 이렇게 물가 차이가 나는 걸까요?
그건 각국의 세금 (VAT), 유통 구조, 인건비, 원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식품이 EU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는 있지만, 최종 판매가격은 각국의 정책과 비용 구조에 따라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는거죠.
EU가 식품 안전에 유독 까다로운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는 사전 예방 원칙 (Precautionary principle)이라는 기조가 깔려 있습니다.
유럽 식품법의 근간은 Regulation (EC) No 178/2002이에요. 말하자면, EU 식품법의 헌법 같은 존재인데요. 이 법은 EU 내 식품 안전과 관련한 모든 정책의 기본 틀과 원칙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선 다음과 같은 원칙이 강조돼요.
1) 식품은 무엇보다 안전해야 하며,
2)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디서 부터 왔는지 추적 (traceability)이 가능해야 하고,
3)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사전 예방 원칙 (precautionary principle)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명확하게 해롭다는 증거가 없어도, '그럴 가능성이 있으면 앗싸리 시장에 내놓지 말자'는 접근이에요. 그래서 EU는 식품과 관련하여 신중하고 보수적인 정책을 펼칩니다.
미국은 이와 정반대 원칙인 사후 대응 원칙 (post market control)에 더 가깝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리콜을 하거나 경고문을 붙이는 방식이에요.
따라서, 미국에서는 새로운 성분이나 기능성 표시가 일단 통과되기 쉽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GRAS (Generally Recognized As Safe) 라고 선언하면 어느정도 판매가 가능해요.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FDA가 조사에 들어가고 조치를 취하죠.
저는 각 대륙의 정책에 장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유럽은 소비자 입장에서 신뢰가 높습니다. 물론, 사전 예방 원칙을 따름에도 가끔씩 식중독 사고, 박테리아 사고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만 새로운 성분에 대한 위험도 노출이 확실히 낮죠. 반면, 미국은 기업 입장에서 도전하고 신제품을 개발하여 출시하기 좋은 환경입니다. 이에 따라, 식재료 개발, 소비자 선호도 등 선진적인 마켓 리서치가 가능하죠.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쯤일까요? 한국은 EU와 미국 그 사이에 있다고 봅니다.
사전 안전성 평가 제도가 있지만, EU만큼 강력한 예방 원칙은 아닙니다.
즉, 허용된 원료, 첨가물 사용은 가능하지만 일부 기능성 표시나 성분에 대해서는 기업의 자료 제출을 기반으로 허용되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식품 산업 진흥과 규제 완화를 강조하는 트렌드로 EU보다 빠르게 신소재나 대체당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알룰로스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1) EU (사전 예방): 미허용, 과학적 안전성 입증 필요
2) 미국 (사후 대응): 허용 (온라인, 한인마트 구입 가능), 기업에서 GRAS 선언 후 유통 가능
3) 한국 (혼합형): 허용 (트렌드 민감 시장으로 대중화), 허용된 원료 목록 우선, 일부 자료 기반 허용
알룰로스는 유럽기준 노벨푸드 (novel food)로 취급됩니다.
즉 EU 내 역사적으로 먹어본 적 없는 새로운 식품이라는 거죠.
이런 식품은 유럽 식품 안전청 (EFSA)의 평가를 거친 뒤에만 판매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알룰로스는 아직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EU 내 마트에서 찾아 볼 수 없는거죠.
식품 라벨 규정
EU 식품은 단지 성분만 중요한게 아닙니다.
어떻게 표시하느냐, 어떤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Regulation (EU) No 1169/2011은 식품 라벨링을 다루는 법인데요,
알레르기 유발 성분, 원산지, 영양 정보, 유통기한 등을 의무적으로 표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건 모든 EU 회원국이 따라야 하는 규정 (Regulation)이기 때문에 국가별로 해석의 여지 없이 공통의 기준으로 작성합니다.
하지만 자율 라벨링 (Voluntary labelling) 제도도 있습니다.
영양성분을 등급별로 구분한 Nutri score의 경우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현재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서 도입 여부를 결정해 소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규정 (Regulation)과 다르게 지침 (Directive)으로 안내되고 있어 EU차원에서 통일하려는 논의는 있지만 여전히 국가별 의견이 달라 완전 통일은 진행중인 과제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유럽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Nutri-score가 무엇이며, 이 흥미로운 라벨 뒤에 숨겨진 논란과 의미에 대해 더 깊이 다뤄볼게요. 유럽 식품의 숨겨진 이야기에 관심 있으시다면, UVINO의 브런치스토리를 구독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