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소 도발적인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바로 '미식의 불모지'라는 네덜란드 음식에 대한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고찰과 경험담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입맛의 차이는 있겠지만,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느낀 점들을 솔직하게 풀어보려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음식들을 '요리 (Cuisine)'라고 부르기엔 다소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오히려 '스낵'에 가깝거나, '조리'에 더 초점이 맞춰진 듯한 인상이죠.
감자와 채소를 삶거나 으깨고, 고기를 곁들이는 단순한 방식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네덜란드 전통 음식들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릴게요. 스템폿 (Stamppot)은 삶은 감자와 채소 (케일, 사우어크라우트)를 으깨어 소시지나 베이컨과 곁들이는 가장 흔한 가정식입니다. 달콤한 간식으로는 얇은 와플 두 장 사이에 캐러멜 시럽을 넣어 만든 스트룹와플 (Stroopwafel)이 유명하죠. 맥주 안주로 즐겨 먹는 비터볼른 (Bitterballen)은 다진 고기와 육수를 튀긴 동그란 크로켓이고, 길거리에서는 염장 청어를 양파와 피클과 함께 날것으로 먹는 헤링(Haring)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마요네즈와 함께 즐기는 감자튀김 파테트 (Patat / Friet), 겨울철에 즐겨 먹는다고 하는 진하고 걸쭉한 완두콩 수프 에르텐숩 (Erwtensoep)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음식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소스나 양념 사용 (공산품 소스인 케첩, 마요네즈 등 제외) 이 극히 드물다는 점입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중시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 미각으로는 '감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소박하고 실용적인 식문화가 발달한 배경에는 검소함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인들의 삶의 방식이 녹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네덜란드의 국교가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화려하고 복잡한 미식보다는 소박하고 검소한 식사를 선호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흔히 '효율성'과 '실용주의'를 최. 우. 선으로 생각합니다.
위의 영상만 봐도 대략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이런 특징이 식문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나 때때로 저를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습니다.
점심 식사 시간의 효율성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식빵 한 봉지와 땅콩버터 통을 들고 다니며 즉석에서 빵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보았고요. 걸어 다니며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도 많죠.
빵에 치즈 한 장만 올려 먹는 것이 점심 메뉴의 전부인 경우도 흔하고, 비터볼른 같은 스낵이 한 끼 식사를 대체하기도 합니다. 회사에 별도의 점심시간이 없거나 30분만 주어지는 경우가 많아, 각자 자기 자리에서 간단히 해결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밥은 먹고 다녀?', '다음에 한 끼 같이 하자.'가 흔한 인사치레일 정도로 끼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먹방을 하나의 콘텐츠 카테고리로 만들어 버린 한국에서 자라온 저는 이러한 식사 문화에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대부분이 저보다 덜 먹는 소식좌에, 영양분을 한국처럼 골고루 따져 섭취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키가 크다는 것입니다. (역시 키는 유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저녁은 그나마 잘 챙겨 먹는다고 하지만, 대개 전날 먹고 남은 음식을 데워 먹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네덜란드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면 다른 유럽 국가보다 날씬하다 못해 모델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절약 정신과 검소함이 식생활에 반영되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과식하는 사람을 좀처럼 보기 힘들고, 식재료를 살 때도 꼭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며, 음식도 딱 먹을 만큼만 조리하는 모습을 자주 접했거든요. 음식에서 감칠맛을 찾기 힘들고, 음식의 간이 약한 이유 또한 '간하는 방법을 모른다'기 보다는 재료 본연의 맛을 중요시하고 자극적인 맛을 선호하지 않는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감자칩 flavor가 파프리카인 것만 봐도 말 다했죠 뭐;)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가진 영국.
그런데 주관적으로 느끼기엔 영국이 네덜란드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영국도 지리적, 기후적으로 비가 많이 오는 환경이지만, '피시 앤 칩스'처럼 튀기면 뭐든 맛있어지는 대표 메뉴가 있고, '스콘' 맛집도 꽤 많죠. 최소한 영국을 생각하면 국제적으로 떠오르는 음식들이 존재합니다.
게다가 영국은 과거 식민 통치를 통해 인도, 아시아 등 다양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영국식 인도 음식, 영국식 아시아 음식 등 현지화된 퓨전 음식들이 굉장히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영국의 식문화를 풍부하게 발전시켜 주었습니다. 실제로 런던 같은 대도시에 여행 가서 괜찮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보면 맛있는 음식을 꽤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음식 명성은 이제 옛말이라는 평가도 많죠.
하지만 네덜란드는 웬만한 식당, 심지어 파인 다이닝에 가도 실망스러운 곳이 적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 수리남,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을 식민 통치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인도 음식처럼 네덜란드화 된 퓨전 음식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아이러니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네덜란드에서는 베트남, 태국 식당보다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찾기가 훨씬 쉽고, 알버트하인 (Albert Heijn), 윰보 (Jumbo) 같은 로컬 슈퍼마켓에서도 케첩 마니스 (Ketjap Manis), 삼발 (Sambal), 코코넛 밀크, 꾸닝 (Koenjit) 같은 인도네시아 소스나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현지에는 없는 네덜란드식 '라이스타펠 (Rijsttafel)'이라는 인도네시아 요리 코스가 있지만, 이는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요리들을 여러 가지 반찬과 함께 소량씩 즐기는 네덜란드식으로 세팅한 소규모 뷔페형 식사일 뿐, 네덜란드 요리 자체에 인도네시아 향신료나 조리법이 스며들어 새로운 독자적인 요리가 탄생한 사례는 드물다는 것이 주류 의견입니다. 영국의 커리나 치킨 티카 마살라처럼, 그 나라의 국민 음식 반열에 오르거나 보편화된 형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예외가 있다면, 바로 네덜란드 & 터키 퓨전 음식 캅살롱 (Kapsalon)입니다. 이 음식은 감자튀김 위에 샤바르마 (또는 케밥 고기), 녹인 고다 치즈, 그리고 샐러드를 얹어 만드는 조합으로, 2000년대 초 로테르담의 한 이발소 손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중동 음식에 네덜란드의 감자튀김 문화가 결합된 형태로 네덜란드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퓨전 음식의 드문 사례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비록 전통적인 식민 역사에서 비롯된 퓨전은 아닐지라도, 네덜란드 내에서 외부 문화의 음식이 현지화되어 큰 성공을 거둔 예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저는 퓨전 음식에 대한 영국과의 차이가 아마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처럼 문화까지 깊숙이 통치하려 했던 방식이 아니라, 동인도회사를 통해 무역 및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형 식민화를 지향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네덜란드가 과거 세계적으로 향신료 수출을 엄청나게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 많은 향신료가 정작 자국 음식에는 깊이 스며들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
저는 이곳에서 전공을 살려 쿠킹 클래스 아르바이트를 종종 하고 있는데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시안 향신료나 소스류 (간장, 삼발, 미림, 참기름 등)에 의외로 관심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입맛에는 '성공적이지 않다'라고 느껴지는 음식들도 그들은 'Oh, so delicious!'를 외치며 굉장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미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건 아닐까?' 이 생각은 다른 나라보다 네덜란드에서 식당을 열었을 때 콘셉트만 잘 잡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허들이 낮은 외식 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는 '요리 과정이 들어간 음식'에서는 약점을 보이지만 '푸드 테크놀로지'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강국입니다. 땅덩어리가 좁고, 비가 많이 오며, 바다보다 지면이 낮고, 산지조차 없는 등 농업 측면에서 봤을 때 지리적·기후적으로 열악한 조건을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스마트팜과 수직농장 같은 선도적인 첨단 농업 기술을 통해 제한된 토지에서 효율적으로 농산물을 생산하고, 온실 재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또한, 대체 식품 개발에 선두를 달리며 식물성 고기, 심지어 배양육, 곤충을 이용한 프로틴 같은 미래 식품 기술 연구 및 상용화에 더 적극적입니다. 또, 식품의 저장, 보존, 영양 강화를 위한 식품 가공 기술도 뛰어나며,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자원을 재활용하는 순환 경제 기반의 식품 생산 시스템 구축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바헤닝언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R&D 투자와 정부, 기업 간의 긴밀한 협력이 이러한 푸드 테크 강국의 원동력입니다.
저는 네덜란드 소비자들이 새로운 '요리된 음식'에는 꽤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지만, 새로운 '식재료'나 '대체 식품'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대체육이나 품종 개량된 새로운 과일, 채소 등이 네덜란드 시장에 비교적 쉽게 진입하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