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는 무능케 하지만 간절함은 유능케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20대 초반 어느 술자리가 떠오른다. 나는 그 이야기가 사실 불편했다. 딱히 피할 수 없었던 군입대를 앞두고 막막했기에 어떻게든 곱씹어 보려 노력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 보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도 될 일일 수 있겠다. 또 실제로 갔다 온 군생활은 예상보다 지옥도 아닌 사람 사는 곳이었기에 복잡하게 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저 말은 여러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결코 내 캐치프레이즈가 될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억울하게 죽게 생겼는데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경우에도 즐길 수 있을까? 글쎄, 너무 극단적인 예에 불과할까? 내가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그것을 기꺼이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군대와 죽음은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 그래도 나는 피할 수 없다는 생각 이전에 어떻게든 피하고 싶단 생각부터 먼저 하고 싶을 것 같다. 사실 즐기라는 표현은 피할 수 없으면 초연해지라는 말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냥 포기하란 소리같기도 하다. 혹은 잠시 인내하란 소리라면, 생각을 긍정적으로 해보란 좋은 구호 같지만 뭔가 사뭇 근시안적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반대로 피할 수 있으면 쉬이 피하란 얘긴데 이 또한 너무 무책임하다. 모두가 피하기만 하면 정작 중요한 일을 뜻하지 않게 무능한 사람이 맡게 될 수밖에 없다. 이건 또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어찌해야 될까?
내 생각은, 피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기에 받아들이고 그 연습을 해야 할 것이고, 차라리 ‘피할 수 있더라도 즐겨라’다. 피할 수 있다면 어차피 좋은데 뭘 즐기나 싶을 것이다. 즐긴다는 것의 함축된 의미가 해소감뿐만이 아니라면 결국 중요한 것은 책임감 아닐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에 덧붙여서 피하기까지의 책무를 다해 임하는 것까지가 완성이지, 단지 해소감에 그친다면 그리 생산적이지 못하다. 물론 대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를 들어, 팀장 제안이 와 수락이 고민되는데 도저히 나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면? 피할 수 없으니 팀장 그냥 받아들이고 즐기는 척 할 수도 있겠다. 한편, 팀장을 면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최선을 다해 피해보고, 이에 성공하면 해소감만 느낄게 아니라 새 팀장에게 누가 되지 않는 팀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까지 다해야 한단 의미다. 의미가 곡해될까 염려된다.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그 1%를 위해 즐기자. 그 피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나의 목표의식을 올인해 보는 것이다. 그러고 성공하면 나의 책무를 다하는 마무리까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 미약한 확률을 향해 삶을 방탕하게 즐기는 게 아니라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회생에 모든 걸 걸어보잔 얘기다. 그렇게 회생란 삶, 가치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편치는 못하다. 그런 극단적 상황에 사실 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메시지는 절벽이 코앞에 놓인 취준생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들에겐 현실이 생사의 고비가 달린 것 못지않게 중대사다. 나는 이 경험만큼은 분명히 해봤다.
결국 요지는 즐기기 위한 대상을 단순한 회피가 아닌, 절망을 피할 가능성으로 대해 보잔 메시지다. 99%의 절망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니 즐길 여지가 분명히 생겨난다. 노력이 작용한단 소리다. 죽음엔 예외 없고 누구에게나 불가항력이다. 이처럼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래 그냥 받아들이자. 그건 성숙한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무엇을 포기할지 혹은 즐기며 받아들일지 잘 선택하고 후회 없도록 임해보자. 이 긴 글을 줄여 취준생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나의 한마디는 '간절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