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vs. 주관성
3월의 마지막 주말, 오프라인 커피챗 중 받았던 질문 중에서 좀 더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던 첫 번째 주제는 바로 'Persona'!
'Persona'는 딱히 번역 없이 그대로 통용되는 용어다 보니, 한국어로 표기할 때 '페르소나'냐 '퍼소나'냐 가지고도 한때 커뮤니티에서 제법 논쟁거리였던 기억이 있다. 굉장히 의미 있으면서도 무의미하기도 한 이 논쟁. 글이라는 매체는 이런 논쟁을 피해 가기에 유리한 도구인 만큼, 나는 비겁하게 'Persona'라고 쓰겠다!
Persona란 간단히 설명하면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의 타깃 사용자 중에서도) 대표성을 지닌 가상의 사용자'를 뜻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는 뭘까? 바로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이다. 대표성이란, '전형성(Typicality)'의 유의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집단에 관해서 대표성 혹은 전형성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흔히 무슨무슨 '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Persona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무슨특'이라는 말의 앞뒤에는 반드시 어떤 특성을 끌어다 대응시킨다. 이처럼 Persona란 어떤 인물이기 이전에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특성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Persona의 핵심은 사실 인물이나 인격이 아니다. 인물은 Persona 방법을 통해 도출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부분 이 인물부터 설정해내려 하다 보니 요식적인 방법론에 그치곤 한다. 이런 식으로 구축된 인물로서의 Persona는 엄밀히 말하면 전부 '가짜 Persona'나 다름없다.
아니 어차피 Persona라는 게 ‘가상'의 사용자니까 다 '가짜'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상’과 ‘가짜’는 개념이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가상'이란, Persona로 구축된 결과물로써의 인물이 비록 실제하는 인물처럼 여겨지지만 재구성된 '허구'란 의미다. '가짜'란 방법론이 정석대로 수행되지 않아 결과물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결국 '가상'의 사용자이어야지, '가짜' 사용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메시지다.
한편 포트폴리오는 물론이거니와 실무에서도 제대로 된 Persona가 설계되는 경우는 솔직히 거의 '0'에 가깝다. 비단 내 경험일 뿐만 아니라, 정통 Persona 교육을 받으셨던 분들의 실제 볼멘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양심선언(?)을 하자면, 나 역시도 제대로 해본 적은 없다고 해야 옳다. 때문에 모종의 속죄(?) 차원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실무든 습작이든 Persona는 또 비겁하게도, 감히 엄두가 안나 활용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Persona란 실은 정석에 입각해 제대로 만들기 상당히 어려운 방법론에 속한다. 그렇다면 지금 작업 중인 내 포트폴리오에 반영된 Persona 역시 '가짜'일 것 같은데 과연 괜찮을지 걱정부터 들 것이다. 결론은 괜찮다! 신조어나 사투리 심지어 비속어 중에서도 다수에 의해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면 표준어로 승격되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이 '가짜 Persona' 또한 그저 불완전한 결과물로만 싸잡아 폄하할 순 없다. 응용력과 테크닉이 더 중요한 셈이다.
요약하면, 방법론의 정석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이를 통해 어떻게 하면 '가짜 Persona' 일지라도 포트폴리오나 실무에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을지 경험적으로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설명했듯 Persona의 핵심은,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특성들의 집합체이지 인물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짜 Persona'란 어떤 결과물일까? 나 또한 사이비이기에 정석을 설명할 자격은 솔직히 없다.
하지만 설정한 그 특성들이 과연 얼마나 '대표성'과 '전형성'을 갖추었는지 여부가 분명 관건이 될 것이다. 이 정도를 일컬어 '신뢰타당성' '설득력' '객관성' 등으로 이름 붙여볼 수 있겠다. 즉, 허구의 인물이 신뢰타당한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답은 '데이터'다. 나이, 성별, 거주지, 취미 등 허구의 프로필 세부 항목들은 핵심 사용자와 관련된 빅데이터를 통해 추출하고 정제된 것이어야 한다. 가상의 인물을 구축하는 특성들 조목조목은 설계자(=디자이너)의 희망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에스프레소가 필요하고, 좋은 에스프레소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양질의 원두는 물론 에스프레소 추출에 관여하는 갖가지 요소들을 의도대로 통제해야 한다. 이때 허구의 인물을 에스프레소에 비유하자면, 질 좋은 원두는 양질의 데이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가짜 Persona'란 이러한 추출의 과정 없이 맛, 향, 크레마 등을 거의 재연한 검은 액체를 에스프레소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이렇듯 본래 Persona란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은커녕 거저 얻어낸 결과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것이 '진짜 Persona'의 정체다.
나를 Persona로 잡아도 괜찮을까요?
지금까지의 설명에 의하면 당연히 가당치도 않은 소리가 된다. 나는 버젓이 현실을 살기에 '가상'의 인물도 아닐뿐더러, 심지어 나의 이모저모 특징들은 에스프레소처럼 뭔가로부터 추출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나를 Persona로 삼는다는 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완벽한 '가짜 Persona'의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질문에 '된다'라고 답변을 했다. 우선, 질문자의 사연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제가 원래 전공은 패션섬유디자인으로 시작했지만, 중간에 시각디자인으로 전과해서 결국 졸업은 편집디자인으로 했거든요. 근데 과제나 졸업작품 때문에 종이 샘플북을 볼 일이 많았는데, 이건 패션 쪽 할 때도 비슷했고 주변에도 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더라고요. 샘플북을 매번 갖고 다니기도 번거롭고, 또 종이다 보니까 오염이라도 되면 나중에 처분하는 것도 어렵고, 불편한 점이 꽤 많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걸 어느 정도 DB화 해서 온라인으로 관리할 수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고, 그 종이가 실제로 쓰인 출판물을 알 수 있게 연계하게 되면 어쩌면 샘플북 없이도 결과물 예측을 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로 서비스를 구상 중에 있는데...
(쓰다 보니 재구성이라기엔 서비스 아이디어 하나를 그린 것 같고, 어쩌면 이미 솔루션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포트폴리오든 습작이든 어떤 프로젝트가 기획 단계부터 지닌 문제의식이 나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나는 '대표성'과 '전형성'을 어느 정도 가진 인물이 되고 만다. 이런 경우, MVP 정도 구축할 단계까지의 도구로써 나를 Persona로 활용할 수 있다. Persona의 핵심이 '대표성'과 '전형성'이기 때문이다.
단, 이렇게 되면 이걸 Persona라고 불러도 되는지에 대해선 솔직히 의문은 든다. 교과서에서는 나 자신을 Persona로 설정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디자인에 디자이너의 주관성이 너무 개입되면 곤란하다는 경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보자면, 나 자신을 Persona로 둔다기보다 나의 문제의식을 통해 서비스에 '진정성'을 불어넣는 작업 정도로 이해하는 선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궁극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주관성'이다. 추출해 낸 가상의 인물이, 내가 속한 집단의 공급자 관점에 갇히는 바람에 신뢰함직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가짜 Persona'가 될 뿐이다. 만약 공교롭게도 내가 서비스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있어 상당 부분 '대표성'과 '전형성'을 갖는다면, 딱 거기까지만! 기획 단계에서 서비스에 진정성을 담는 측면으로 잘 활용하면 되겠다. 결국 나중에는 제대로 된 Persona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Persona 때문만이 아니다. UX를 둘러싼 각종 화두나 의문들은 하나 같이 O, X 퀴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더 컸다.
여러분들이 현업의 실제 상황에 처해 있다면, 교과서를 믿을 것인가? 설득력을 따를 것인가? 설득력을 위해서는 때론 교과서도 과감하게 제물이 될 수 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더 나아가,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거듭난다는 것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 한 가지 힌트를 얻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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