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과 만드는 것은 다르다
차를 좋아하는 것과 차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건 다르다. 이 말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소비자적 위치에서 출발한다. 브랜드의 철학, 디자인, 성능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행위다. 반면, 만든다는 것은 설계, 조립, 실패와 수정이라는 고된 반복을 감수해야 하는 생산자의 자리다. 이 두 태도는 서로 다른 동기와 에너지를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아함’을 기반으로 진로를 탐색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실제 업무에 얼마나 지속력을 발휘하는지는 결국 ‘만드는 과정’을 겪어봐야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진로 초기에 “좋아하는 브랜드를 중심으로 살펴보라”는 조언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이는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이다. 그 이후의 검증은, 직접 만들어보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겪어봐야 안다.
UX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해봐야 알아요.” 틀린 말은 아니고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들었을 땐 왠지 빈말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보라는 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어도 손끝에 잡히는 건 없었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 ‘경험’이 뭔지부터가 추상적이었다. 게다가 준비된 것도 없어서 어수선한데 시작을 어찌하란 말인지…
마치 이렇다. 누가 “키스는 어떻게 해?”라고 물었을 때, 건축학개론의 납득이 처럼 “머리를 15도 기울이고 눈은 반만 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이밍을 봐야 해” 하고 조목조목 설명은 가능하다. 듣는 사람도 고개는 끄덕이지만, 막상 실전에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날 것이다. 결국 필요한 건 경험인데, 설명은 설명일 뿐이니까. UX도 그랬다. 이론을 아무리 익혀도 현장에서는 늘 예상 밖의 상황이 터졌고, 그때마다 스스로 깨지고 부딪혀가며 알게 되는 게 전부였다.
UX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프로세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매번 다른 변수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회의 중 갑작스레 바뀌는 기획 방향, 개발 환경의 제약, 사용자의 예상 밖의 반응들. 예상했던 흐름이 무너지고 다시 조율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마치 지도는 있는데, 도로가 공사 중인 것처럼 자꾸 우회해야 하는 기분이다.
처음엔 이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준비해 둔 플로우는 무용지물이 되고,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감이 생겼다. ‘이럴 땐 이렇게 피해 가야겠구나’, ‘지금은 그냥 듣고 넘어가는 게 낫겠구나’ 하는 식의 조심스러운 판단력. 이건 책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당황하고 난처했던 경험들 위에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각이 하나둘 쌓이면서 나는 내 방식대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런 불확실한 현실을 계속 겪다 보면, 나만의 판단 기준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던 일들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어렴풋이 감이 온다. 그렇게 작게 쌓아 올린 감각들이 결국 하나의 가이드가 된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든 매뉴얼이다.
멘토링을 하게 되었을 때, 질문을 받고 단순히 답을 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왜 나왔는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질문은 항상 그 사람의 고민, 불안, 또는 열망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멘토링은 ‘정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더 명확하게 다듬어주는 일에 가깝다고 느낀다. 내가 걸어온 경험들이, 누군가의 물음에 실마리를 줄 수 있을 때, 이 일이 조금은 의미 있어진다.
실무를 몇 년 겪고 나면 자연스레 생기는 착각이 있다. 이제는 내가 뭔가를 ‘제법’ 만들 줄 안다고 느끼는 순간들. 하지만 그럴수록 문득문득 처음의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는 진짜 ‘만드는 사람’일까? 아니면 여전히 ‘좋아하는 감정’을 발판 삼아 간신히 유지되는 중일까?
이 질문은 처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어렵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일정 수준의 기술과 경험이 쌓이면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 것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만드는 사람이라면, 단지 반복이 아니라 의도를 갖고 무언가를 설계하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잘 만든 결과를 감상하지만, ‘만드는 사람’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고민한다. 이 차이를 매 순간 증명해야 하는 게, 내가 이 일을 계속하면서 느끼는 가장 어려운 점이다.
정리하자면, 진로를 고민하는 데 있어 ‘내가 생산형인가 소비형인가’를 생각해 보는 건 꽤 유의미한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경험해 보는 것이다. 어설프더라도, 실패하더라도. 내가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인지를 알려면, 일단 몸과 손을 움직여야 한다. 경험은 내게 답을 떡하니 말해주진 않는다. 다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묻게 만든다. 그게 결국,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