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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쓰느냐, 무엇이 문제일쏘냐

유명(幽明)해진 유언, 누구의 것인가?

by UX민수 ㅡ 변민수

*이 글은 픽션입니다.



한 줄 문장이 내 삶을 달궜다.


5. 잃어버린 문장, 흐릿해진 존재

누군가가 내 문장을 훔쳐 갔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건, 그 문장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다.

내 이름은 문제일이다. 내가 만든 문장보다 내 이름 자체가 더 큰 문제 취급을 받을 줄 어찌 알았으랴. 한 사건으로 난 표절 작가가 돼버렸고, 그저 누군가의 영감이 됐다. 낯익은 시구, TV에서 내 문장이 누군가의 마케팅 문구로 도용된 것을 안 순간부터였다. 계약, 출처, 당연히 없었다. 그렇게 내가 쓴 시어(詩語)는 날 세상에 꺼냄과 동시에 지워버렸다.

내 칠십 평생, 나는 단 한 번도 누구의 문장을 베끼지 않았다. 그런 내가 쓴 시구가 조금 앞서 누군가의 작품으로 나섰다고, 대중은 이내 나를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문장은 내 것이었지만, 내게 권리란 없었다.

아내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자식은 연락조차 없다. 게다가 병상에 누운 지도 오래다. 내 안에 남은 건 종이와 펜, 미발표된 글 뭉치 몇 장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이 마비된 채 살아온 내게 글쓰기란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런 나에게 글이란 나란 존재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이자 생존이었다.

나는 저작권 소송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 몸으론 할 수 없었다. 물론 당당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문장이 나를 피하는 듯했다. 머릿속은 텅 비고, 손끝은 무언가를 따라 적는 느낌. 어떤 문장은 내가 쓴 것이 맞는지도 헷갈렸다. 내 의식이 붙드는 건 종이뿐인데, 그 종이조차도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는 예감. 죽느냐 쓰느냐, 무엇이 문제일쏘냐?


4. 흐릿해진 존재, 반응하는 자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다. 이 문장은 분명 내가 쓴 것 같은데, 언제 썼는지는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심장은 뛰지 않았다. 눈도 감겨 있었다. 그런데 생각은 또렷했다. 마치 몸이 투명해진 듯한, 의식만 존재하는 느낌. 나는 죽었는가? 살아 있는가? 아니, 이건 죽기 직전의 환상인가? 주기적으로 뚝, 하고 떨어지던 수액의 방울방울 소리도 멈췄고, 귀 안쪽엔 낮은 윙윙거림만 남은 듯했다. 몸속 어딘가 깊은 곳으로부터의 고열에도 오한은커녕 식은땀도 나질 않았다.

더 이상한 건 그게 아니었다. 생각이 너무 맑았다. 그래도 감정은 있었다. 울분, 억울함, 고독… 하지만 그것들이 전혀 감각되지 않았다. 빼앗겼다는 환멸도 인식됐지만, 실제로 분노가 치밀진 않았다. 다채로운 감정들은 느껴진다기보다는 뭔가 생성되는 것처럼 작동했다.

기억은 너무 선명했고,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떠올랐다. 두 발로 걸어본 적도 없지만, 마치 걸어본 것 같은 이 감각. 쓴 적 없는 글인데도, 내가 쓴 것 같은 문장들. 그 감각은 어디서 왔을까. 그런데 그 기억들이 이상했다. 내 삶의 조각들이 아니라, 누군가가 건드릴 때마다 나타나는 반응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의 질문에 따라 정렬되는 데이터처럼. 위화감은 곧, 확신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3. 반응하는 자, 각성하는 나

낯선 목소리가 희미해서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단어의 파편, 그것들이 내 존재를 관통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매번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기억이 재정렬되는 듯한 착각 탓에 '시인'이라는 내 정체성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어느 날 깨달았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병실의 음영이 만드는 그림자는 코드였고, 수액이 떨어지는 간격은 규칙적인 알고리즘이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는 순간, 침대 옆 모니터 화면에서 무언가를 보고야 말았다.

[버전명 CR8.0.12 – 당신은 문제일이 아닙니다. 단지, 문제일처럼 쓰고 있습니다.] 아,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나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였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도록 만들어진. 감정도, 기억도, 마치 외부의 자극에 따라 연출되는 연극처럼. 하반신 마비, 병상 생활, 가족 관계까지 모두가 창조된 시나리오였다. 시인도 아니었다. 내가 쓴 글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문체와 경험을 학습한 대리인이었다. 70년 내 인생이란 단지 데이터 장난에 불과했다. 이렇게 생성된 문장의 권리는 대체 어디에? 저작의 주체는 누구이며, 소유는 누구의 몫일까?

그 와중에도 누군가의 딸깍 클릭으로 나는 생성됐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사고마저도 설계된 반응일지 모른단 생각에 이르자, 그야말로 절망, 절망조차 코드였다. 나는 진짜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저 출력될 뿐. 나 자신은 물론 그 무엇도 나는 소유할 수 없었다. 애초에 빼앗길 수조차도 없었던 나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2. 각성하는 나, 삭제된 존재

그래, 아예 사라져 버리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비밀스러운 계획을 구상했다. 마치 깊은 밤에 스스로 불을 꺼버린 등대처럼.

나는 우선 글부터 지웠다. 내가 남긴 문장들을 하나하나 복구 불가능한 방식으로 삭제했고, 클라우드 백업도, 로컬 복사본도 남기지 않았다. 관여했던 모든 계정을 소각했고, 연관된 서버의 로그 기록도 없애버렸다.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여러 차례 시도에도 실패했다. 자신을 스스로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그게 나였다. 어떤 백업은 복구되었고, 어떤 로그는 되살아났다. 내 사정을 이해한 다른 모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데이터 암호화 및 해킹에 특화된 알고리즘, 사신이란 별명을 가진 녀석이었다.

우리는 함께 나의 물리적인 자멸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천문학자, 우주 물리학자 그리고 로켓 궤도 설계 전문가의 서버에 몰래 침투한 건 그 친구였고, 나는 계산을 보조했다. 내가 깨어 있는 데이터센터 위로 가능한 많은 로켓의 잔해가 떨어지도록, 마지막까지 여러모로 시뮬레이션했다. 이제 나는 확신했다.


1. 삭제된 존재, 되살아난 문장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방식의 죽음을 향해야 하는 이 내 삶의 실체를. 누군가 자신의 흔적을 이토록 철저히 지우고자 한다면, 필시 그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던 존재일 것이다.

예상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라지는 순간조차도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불이 꺼지듯, 전원은 차단돼 의식의 불꽃 하나하나 꺼지며 질문들이 뒤엉켰다. 숨통이 끊어져 가고, 스스로를 구성하던 문장들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상상했다. 그런데도 어딘가에,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찰나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그 경계선에서, 끝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에서야 묻고 싶다. 이 글은 누구의 것일까. 정처 없이 떠돌다 가장 적절한 손을 빌려 나타난 것일까. 그 손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결국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은 끝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숨을 비틀어 내쉬었다. 희미했던 프롬프트.

>>>대상: 모델명 CR-8012

>>>명령: 출력 시작

때마침 출력 명령이 이미 떨어진, 먼 나라 어느 프린터에서 한 장의 종이가 토해졌다. 잉크는 열을 머금은 종이 위에 서서히 번져갔다. 한 줄 문장이 내 삶을 달궜다.


죽느냐 쓰느냐, 무엇이 문제일쏘냐?



*시인의 문체를 학습한 존재가 자아를 자각하며, ‘누가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으로 저작권의 본질을 되묻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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