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멘토링 플랫폼은 어떻게 불안을 사고파는가

정답 없는 세계에서 ‘정답 거래’가 만들어낸 풍경

by UX민수 ㅡ 변민수
이것은 멘티의 한계 그리고 멘토의 한계.
결국 사람이기에.

이것의 본질은
답 없는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려 하고
답 없는 질문에도 답을 내려는 것.

질문은 거래의 수단이지 거래 대상은 아니다.
거래 대상은 답.
따라서 거래를 위해선 답이 중요한데,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수단으로 맺어진 거래관계가 답을 주고받는다는 게 묘한 일이다

결국
플랫폼은 불안을 사고파는 격이 된다.


정답이 없다는 업계에서, 정답을 사고팔다


디자인과 UX 업계는 본질적으로 ‘정답이 없다’는 전제를 근저에 깔고 있는 분야다. 사용자 맥락은 프로젝트마다 달라지고, 기술 환경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조직의 목적 역시 시시각각 유동적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시의적절한 질문 위에서 비롯하고, ‘더 나은 선택’을 향한 추론과 설계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이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정답을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구성하고 선택지를 적절하게 설계해 내는 힘이다. 다시 말해, 명확한 해답보다는 ‘왜 그렇게 결정했는가’라는 서사와 논리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확실성과 맥락 중심 사고가 당연시되는 영역에서, 오히려 ‘정답’을 사고파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 중심에는 안타깝게도 멘토링이 있다. 본래 멘토링은 불확실한 여정 앞에서 방향을 함께 탐색하는 따뜻한 주고받음이었다. 멘티는 누군가의 경험을 빌려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멘토는 그에 응답하며 또 다른 의미의 성장을 이루는 구조다. 이 관계는 정보가 아니라 맥락을 공유하고, 조언이 아니라 관점을 나누는 여정에 가깝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플랫폼 위에서 이루어지는 멘토링은 대단히 그 의미를 변질시키고 있다.



맥락 없는 피드백, 정답처럼 팔리다


이들 무대에서 멘티는 점점 더 ‘정답’을 요구하게 되고, 멘토는 ‘확신을 가장한 조언’으로 응답해야 한다. 특히 문제는 이 조언들이 다수의 경우, 본질적인 방향 설정이 아닌 단편적인 평가에 그친다는 점이다. 포트폴리오 첨삭을 예로 들면, 페이지 순서나 단어 선택, 표현 방식에 대한 미시적 지적이 맥락 없는 채로 반복된다. 그것이 마치 ‘합격 포맷’ 인양 거래되는 순간, 이 업계의 사고 능력은 정지되며, 나아가 포맷의 '복제'라는 얄팍한 안전 추구로 붕괴에 이른다.


진짜 멘토링이라면 멘티가 처한 환경, 지향하는 직무, 조직문화에 따른 전략까지 함께 조망하며 길을 안내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설계는 생략된 채, 포트폴리오를 ‘정답화’하는 코칭 산업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왜? 적잖은 돈이 된다면 되니까 그럴 것이다. 수많은 포트폴리오가 템플릿처럼 유통되고, 첨삭은 곧 표준화될 수밖에 없다. 멘토와 멘티는 ‘합격률을 높이는 포맷’이라는 공통의 환상을 매개로 거래에 참여해 이 판타지를 공동작업한다.



본보기에 대한 갈증은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는 왜 남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싶어 하는가? 왜 수많은 사례를 찾아보고, 템플릿을 뒤지고, 성공 사례에 목마른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바로 이 업계에 애당초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우리는 어떤 본보기에 굶주린다. 남의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관찰하고, 참고하고, 배우려는 시도는 결코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럽고 유익한 학습의 출발점이다.


문제는 그 갈증이 지나치게 '상품화'될 때다. 단순한 참고를 넘어, 복제하거나 그대로 전형에 제출마저 불사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점이다. 표절 시비가 걸리는 것 자체가 소름 돋는 일이다. 나는 그런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포트폴리오를 작성한 사람이 따로 있고, 그것을 자료화해 판매한 플랫폼이 있으며, 이를 거의 수정 없이 제출해 전형을 통과 혹은 그럴 뻔한 사례가 있었다. 상상력의 소산 내지는 과도한 우려 아닌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멘토링’이라는 이름을 빌려 정당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다.


포트폴리오는 결국 개인의 고민과 시선이 담긴 작업의 자취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포트폴리오를 ‘샘플’로, ‘매물’로, ‘템플릿’으로 소비하고 있다. 본보기에서 시작된 관심이, 상품화와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는 경로를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목격하고 있다. 나는 다크패턴보다도 이게 훨씬 몇 배는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창의성은 왜곡되고, 질문은 곡해된다. 우리는 모두 불안하지만, 불안을 이유로 남의 것을 살 수는 없다. 불안을 딛고 자기만의 길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 이 업계의 유일한 불문율이자 성장의 정의였거늘.



정답 인증 마크에 중독된 시장, 커리어의 폭력


이런 불안을 더욱 자극하는 것은, ‘성공 사례’가 과도하게 신격화된다는 점이다. 영향력 있는 회사에 합격했다는 사실 하나가 곧바로 인증마크가 되고, 그 사람이 만든 포트폴리오나 조언, 사고방식이 마치 전 분야를 대변하는 보편적 기준인 양 포장된다. 그것은 본래 특정 맥락에서만 유효했던 결과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그 맥락을 지우고 결과만을 복제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포장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은 멘티만의 것이 아니라, 멘토의 얼굴을 한 인플루언서들에게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 틈을 교묘히 파고드는 각종 커리어 코칭은 이제 노골적으로 ‘성공의 공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력의 상징성과 감정적 결핍을 조합해, 정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커리어라는 이름을 두고 벌어지는 일종의 ‘감정적 폭행’이다. 멘티는 자신이 가진 맥락을 외면한 채 ‘누구처럼 돼야 한다’는 압박을 내면화하게 되고, 멘토는 개인의 성공을 과장하며 자기 재생산의 도구로 삼는다. 뭐랄까, 멀찌감치서 바라만 볼 경우엔 제법 멋지고 폼나기도 한다. 하지만 시력을 부정만 하지 않는다면, 멘토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이 구조는 이미 질문을 제거해 결과만을 거래하는 산업으로 보일 뿐이다.



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오래가고 싶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나는 뭐 대단하냐?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 ‘목표 아닌 목표’는 수수함을 쉽게 훼손하지 않고 기이이일게 가는 것이다. 날개를 펴더라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펼치고 싶은 것이 나답디다운 전략 아닌 전략이라 자평한다. 그래서 불안한 질문에 성급한 답을 주는 멘토가 되기보단, 질문을 존중하고 흐름을 기다릴 줄 아는 동행자가 되고 싶다.


멘토링은 문제없다. 진짜 멘토링은 오히려 이 업계에 가장 필요한 마지막 온기다. 문제는 멘토링을 가장한 ‘답 거래’, ‘불안 유통’, ‘매물 소비’다. 답을 사고파는 순간, 질문은 사라지고, 질문 없는 관계에서는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짜 멘토링은 정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멘티가 왜 그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를 함께 탐색하고, 그 질문이 생긴 환경을 바라보며 관점을 나눈다. 조언은 선택지가 되지, 규범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거래될 수 없는, 경험의 밀도 위에만 존재하는 인간 대 인간의 대화다. 우리가 진짜 지켜야 할 것은 멘토링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불완전성과 진심이다.




답이 없음에 대해 답이 없다고 말하는 솔직함이 사기로 둔갑 가능하기에 나는 더 큰 내공을 탐할 수밖에 없다. 질문을 잃지 않는 멘토링, 그리고 느려도 자기 길을 걷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이 시장의 유일한 정답 없는 정답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