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세편살’이라는 말은 종종 세상은 복잡하니 나는 편하게 살겠다는 태도로 오해된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말은 삶의 전략이라기보다 삶의 거리감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기술과 제도와 조직은 사람의 이해 속도를 앞질러 달려가지만,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별다른 마찰 없이 하루를 살아낸다. 문제는 이 둘이 항상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내 삶의 편안함과 세상의 복잡함은 같은 축 위에 있지 않다.
만약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내 삶만 계속 편하기를 바란다면, 그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위치는 생산자라기보다 소비자일 가능성이 크다. 복잡함을 감내하고 풀어내는 쪽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미 정리해놓은 결과를 사용하는 쪽에 가까워진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역할의 문제다. 반대로 세상의 복잡함이 줄어들고, 그 여파가 내 삶의 편안함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디자이너로서의 태도, 혹은 가능성이 생긴다.
회사라는 조직에서도 이 간극은 그대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월급을 받지만 존재감이 희미하고, 누군가는 조용히 일하지만 사라지면 바로 티가 난다.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없으면 바로 드러나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이 눈에 띄는 성과를 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다루고 있던 대상이 조직의 복잡도 그 자체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레거시, 엉켜 있는 프로세스, 아무도 손대고 싶어 하지 않는 회색 지대와의 직접적인 사투. 그런 것들과 맞붙어 있던 사람이 빠져나가면 조직은 마치 방어막을 잃은 것처럼 즉각적인 직격타를 맞는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깨닫는다. 그가 ‘아무 일도 안 한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모두가 보기 싫어하던 복잡함을 혼자서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방법론은 왜 존재할까. 방법론은 여러 사람이 이 복잡도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무기다. 개인의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도,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돕는 장치이자 언어다. 그 무기를 통해 기술과 사고방식이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혼자만 싸우지 말고, 다 같이 싸울 수 있게 하자는 의도다.
문제는 방법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그 자체가 결과물처럼 대우받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무기가 위력적이고 멋지다는 것과, 그 무기로 실제 목표를 괴멸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도 무기를 잘 다뤘다는 사실만으로 전투가 끝난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 주객이 전도된다. 방법론을 썼다는 사실이 성과를 대신하고, 프레임을 그렸다는 이유로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여겨진다.
결국 어떤 방법론을 쓰든, 실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추가적인 노력이 반드시 들어간다. 방법론이 복잡함을 완전히 제거해주는 일은 없다. 다만 복잡함을 다룰 수 있는 형태로 바꿔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일종의 복잡도 불변의 법칙이 작동한다.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진 복잡함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된다.
방법론만 남기고 그 뒤의 책임과 실행을 외면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의도치 않게 빌런이 된다. 보기 좋은 산출물과 말끔한 다이어그램 뒤에서 실제 문제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 부담은 다른 누군가의 몫이 된다. 이때 방법론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방패로 변질된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방법론이 또다시 빌런을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디자이너를 히어로로 만들 것인가. 진짜 디자이너, 진짜 히어로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사람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는 방법론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방법론을 무기로 쥐되, 전투의 끝까지 책임진다.
히어로는 복잡함을 제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복잡함이 더 이상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복잡도를 흡수하고, 조직과 사용자가 편해지는 방향으로 흘려보낸다. 그 결과로 세상이 조금 덜 복잡해지고, 누군가의 삶이 조금 더 편해진다면, 그때 비로소 방법론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복세편살은 그래서 편함을 탐하는 태도가 아니라, 복잡함을 책임질 각오에 가깝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그 복잡함이 나를 거쳐 누군가에게는 편안함으로 전달된다면, 그 사람은 소비자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자리에 서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