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가지의 가짜 고민과 1가지의 진짜 고민
한자로는 괴로울 '고'에 답답할 '민', 사전에는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운다고 되어 있다. 결국 괴롭고 애가 타는데, 그 이유가 답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왜 답답할까? 생각해 보자. 어떨 때 답답했는지를.
예를 들어, 나는 성격이 급한데 상대방이 쓸데없이 여유 부리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도통 읽지를 않고 있다면 이 역시 답답하다. 간단히 말해, 그저 내 뜻대로 뭔가 되지 않아서 답답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민을 없애려면 내가 뜻한 대로 모든 일이 전개되기만 하면 된다. 근데 과연 가능할까? 혹시, 돈이 엄청나게 많으면 진짜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아는 유명한 갑부들 또한 그네들의 만사가 마냥 그들 뜻대로 다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저 내 뜻만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며 속 편하게 산다면? 이 또한 뉴스에서 본 여러 갑질사건들을 떠올려 보면 답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아예 반대로, 내 뜻이란 다 내려놓고 체념모드로 온전히 주변 상황에 다 맞추면 고민과 영원히 작별이 가능할까? 언젠가 반드시 한계점을 맞이할 게 눈에 선하다.
이 글을 볼 사람들 정도의 나이대라면 위의 방식들을 다 생각도 해보고 수차례 여러 행동 또한 시도해 봤을 것 같다. 근데 어떤가? 물론 잘 해결된 고민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고민거리들은 버젓이 살아있지는 않은가. 게다가 분명히 해결이 되었다고 믿었던 고민도 얼마든지 부활하곤 한다. 생각나는 어떤 화두에 아마 신물도 날 것이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사는 게 몹시 참 답답하다. 오죽했으면 불교에서는 아예 '인생은 고(苦)'라고 잘라 쳤을까. 어쩌면 고민이란 삶에서 뗄 수 없는 혹인가 싶다. 결국 종류를 막론하고 고민은 계속 흐른다. 다 아닌 척 살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민하는 이유, 고민의 핵심은 '내 뜻대로 뭔가 되지 않음'이다. 이것을 잘 곱씹어보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품은 뜻, 의도나 의중이 내가 살아가는 현실 세상에 제대로 투영되지 못해 좌절한 상태라 볼 수 있다. 결국 나라는 내부세계와 나의 외부세계 간의 부조화가 원인이다. 이것이 답답함, 고민의 정체라고 나는 정리한다.
그럼 내 고민을 없애려면, 내가 답답하지 않도록,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를 조화롭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이 말에 '그래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를 잘 조화롭게만 만든다면 그 어떤 고민 따위도 다 상쇄되겠군!'이라며 기뻐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다분히 수학적인 접근으로 이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두 가지의 전략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현실적으로 돈이 많아도 또 자포자기를 하더라도 답답함을 종식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노력은 최소화다.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상태의 반대는 내부세계와 외부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다. 즉, 만사형통한 순간이다. 개념은 단순하지만 실현이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왜 고민하는지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의외로 답에 쉽게 근접할 수 있게 된다. 살아오면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았던 순간도 아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왜, 어떻게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각자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일상적으로 '고민할 필요 없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 표현이 쓰일 때는 이미 마음이 확고한 경우다. 즉, 저울질할 대상 자체가 마음속에 없는 상태다. 선택지란 그저 하나뿐, 아니 저울질할 비교 대상 자체가 없으며, 현 상황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뭔가 고민하지 않는다. 즉, 고민이 원래 있건 없건 어쨌든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 상태다. 사실 이건 그리 위중하진 않은 상태다.
우리가 고민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사안이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일에는 큰 고민이 붙지 않는다. 즉, 반대로 해석해서 고민하는 이유는 그 사안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령 사실 대수롭지 않은 사안임을 내심 알아채고 있더라도 어떤 순간만큼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100가지 고민 중 고민할 가치가 있는 고민은 사실 극소수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일순간 눈이 돌아간 상태라 볼 수 있다. 당연히 객관적으로 자가검증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고민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은, 고민하는 사안이 정말 고민할 가치가 있는지부터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정말 어렵다.
일단 고민에 빠지면 무엇이든 답 같은 것을 내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 구한 답이 명확히 틀린 것도, 그렇다고 확실히 맞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쉽게 그 고민이라는 명제에 유혹당한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붙들고 있게 된다. 정말로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자. 이게 정말 고민거리가 맞는지를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보통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못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예상치 못한 예외 상황이 닥쳤을 때 그렇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외부에서 이 상황에 대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들어본 적조차 없다면 더욱 알쏭달쏭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험의 폭과 깊이가 중요하다. 만약 내 경험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활용해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고도, 처음 가졌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 고민거리를 부정하지 못한다. 예컨대 '운이 없었다'라고 결론을 내리며, 그 운 없음의 중심에 나 자신을 놓고선 자신을 단단히 탓하게 된다. 그렇게 믿다 보면 또 언젠가 운이 내게도 작용할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게 된다. 왜냐하면 그 문제 자체는 여전히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정당한 고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반복되면, 우리는 더욱 확실한 것을 갈망하게 된다. 분명히 확실한 정답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무엇이든 확실한 것만을 취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위험하다. 이 확실성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잘못된 믿음에 쉽게 빠지게 만든다. 세상에 믿어야 할 명제는 단 하나뿐이다. 공짜는 없다. 공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을 뿐, 결국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대가를 치르면서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한단 것이다.
다시 강조하는 바, 많은 경우 객관적으로 고민거리가 아닌 것으로 우린 고민한다. 그리고 고민거리가 설령 맞다 하더라도 여러 고민거리들의 경중을 따졌을 때, 상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과연 나와 연계된 고민거리들 중에서 정말 중요한 고민만을 하며 사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물론 이렇게 적고 있는 나 역시도 매우 어렵고 잘 못하는 화두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고민에 내 자원을 쏟을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디자인(D)을 할 때도 정확히 일치한다.
Photo by Karla Hernandez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