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치 않은 일기
”저는 대학생 때 실리콘밸리에 방문한 후 제품 관리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창업가들이 시장의 최전선에서 고객들과 소통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객 가치를 실현시켜나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창업가들끼리 진심으로 성공을 바라며 도와주는 과정이 저에게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아, 저렇게 서로 도와주고 상생하며 성장하는 생태계가 존재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저도 그러한 문화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말은 직무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말할 때 항상 하는 대답이다.]
2019년, 대학생이던 무더웠던 여름, 우연히 만난 스타트업 창업자분께서 팀 합류를 제안하셨고, 친히 정부지원사업으로 나를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으로 데려가 주셨다. 지역 스타트업 하우스 행사를 참석하여, 아무 대가 없이 활발히 서로 네트워킹하고 도우며 만들어 나가는 생태계를 직접 목도한 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는 1~2년 전부터 언급됐던 스타트업의 겨울,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AI 거품론과 이커머스 위기가 겹치면서 이 시장 자체의 추악한 면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그리고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유사 스타트업 조직들을 경험하면서 상처를 받거나 내 결심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한 사건들이 적지 않다.
[최근의 면접]
(1) ”근데 한국에서 그게 실천 가능하던가요 ㅋ?”
내 직무 결심 계기를 듣고 면접장의 대표가 내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상향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느냐, 혹은 그렇게 일하면 일이 안 굴러간다는 식으로 넌지시 던진 말이었던 것 같다.
(2) ”왜 하나 했네 ㅋ”, ”그거 해봤자일텐데요? ㅋ”
최근 마지막 회사 퇴사 이후, 제품 관리적 차원으로 지식을 늘리고자 디자인과 개발에 대해 좀 깊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취미로 수학과 과학 앱을 사용하고 있다. 이 내용을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넣었었는데, 옆의 해당 회사의 제품 관리자가 왜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하냐는 태도로 내던진 말이었다.
그 제품 관리자라는 사람은 엘레베이터까지 나를 배웅해주면서까지, 개발 공부해봤자 쓸 데 없다는 식의 얘기를 이어갔다. 면접장에서도 유독 ‘PM은 팀원을 그냥 찍어눌러야 한다.’라는 스탠스로 집요하게 관련 질문을 이어가기도 했다.
[나의 이상을 부정하기 시작한 현실, 그리고 부정당한 것들]
사실 대기업급의 큰 계열사에 합격하여 일주일 만에 나온 적이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폭언과 성희롱, 그리고 여직원들에게 추근대는 사수. 대놓고 ‘여기 일은 일주일이면 배운다. 다른 건 자존심 굽혀가면서 비위 맞춰주는 게 일이다.’라고 조언하던 윗 기수 선배. 이런 곳은 내가 원하던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치열하게 업무하며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스타트업. 그게 바로 내가 미국에서 받았던 인상과 감동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른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여직원과 엮어 저급한 농담을 사내 메신저에서 공개적으로 하던 대표
- ‘예의있게 말한다고 해서 예의있는 게 아니다.’라며 일방적으로 업무를 거부하던 직원
- 회식 자리에서 누구와 잤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직원들
- 다른 사람들에게 학위를 속이는 대표
안 좋은 것들은 빨리 잊으려고 하지만, 뇌리에 박혀 상처가 된 것들이 많아 잊혀지지 않는다.
최근 어떤 스타트업은 대표가 미팅에서 직원에게 폭언을 하고, 특정 팀이 멍청해보인다며 팀원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했다는 말도 들었다. 무엇이 이토록 꿈으로 가득 차야했던 스타트업 업계를 병들게 만들었을까?
[ㅈ소기업과 스타트업]
중소기업을 ‘ㅈ소기업’이라고 부르는데, 블랙 기업이 판치는 중소기업계를 조롱하는 단어다. 사람을 인격체로 다루지 않고, 업무는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며, 수익이 변변치 않은 소규모 회사가 이에 해당한다.
2021년까지 스타트업 붐이 극에 달했을 시기, 스타트업은 중소기업과 다른 기깔나는 무언가였다. 꿈으로 가득해 보였고,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VC 시장이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그 화려하던 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적지 않은 스타트업들이 비즈니스 모델 없이 투자금을 마구 소진해대거나, 정부지원금에만 의존하며 근근히 버텨갔다. 스타트업은 정말 욕먹는 중소기업과 다른 기깔나는 무언가인가?
[블랙 기업의 공통점]
주위 사례들과 기업 리뷰들을 종합하면 추악한 기업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1) 팀원을 공개적 혹은 우회적 방식으로 비난하여 자존감을 낮춰 굴복하게 만들 것
(2) 일 저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을 것
(3) 본인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데 일단 실무자한테 뭐라도 만들어오라고 시킬 것
악명 높은 여러 기업 리뷰들을 보면, 실제로 퇴사자들이 공황장애가 오거나 우울증으로 정신치료를 받으며 회사를 다닌다고 한다. 근데 더 암담한 점은, 채용 브랜딩이 기깔나게 되어있는 곳들도 저런 곳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본성상 본인이 살기 위해 대부분은 (진심이 아니더라도) 조직의 편을 들고자 한다. 그렇게 조직들은 썩어들어간다.
최근 구직 단념 청년이 증가 추세에 들어들며 40만 명을 달성했다고 한다. 과연 이 청년들을 ‘의지 부족’으로 탓하며 내몰 수 있을까? 최소한 나는 양심상 그렇게는 못 하겠다.
[진짜 실리콘밸리는 이렇게 일한걸까?]
스타트업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몇 주간 실리콘밸리에 갔을 때, 스타트업 대표분과 산타 클라라 지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미국인과 헬스장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새로운 시각, 다양하게 펼쳐지는 인간군상을 발견해나가는 재미는 너무나도 짜릿했다. 정말 자신의 꿈이 사업과 맞닿아 있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모여, 협력하고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사용자에게 다가가 인터뷰하고, 실제로 작동하는 무언가를 만들며 시험해보는 그 과정 자체가 소중했던 것이다.
스타트업의 폭발적 성장을 이끈 제로 투 원, 그로스 해킹과 같은 유행어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으나, 왜 결말은 아름답지 못했을까? 아무리 90% 이상의 스타트업들이 망한다지만, 조직의 존폐를 넘어 개인의 존재적 가치조차 경멸되는 상황이 와버린 것일까?
최근에 해외 원서를 읽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부분이다. 정말 스타트업은 유행어로 그저 일반 중소기업을 치장하기 위한 단어였는지를 배워나가기 위해서였다. 어찌 보면 내 자기소개에 나온 결심에 대한 회고와도 같았다.
[알던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책을 읽건 스타트업의 제품 관리의 큰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사용자를 직접 만나 제품의 사용 맥락에 공감할 것
(2) 사용자의 가치와 연결된 지표를 정의하고 제품을 만들 것
(3) 가치있는 제품을 만든 후 수익성과 시장성을 검증하고, 시장성이 있을 때 확장할 것
(4) 단, 1번부터 3번까지 빠르게 실험하며 반복할 것
이 네 가지 중에 적어도 한 가지 이상 수행하는 곳이 몇이나 될까? 사실 1번이라도 제대로 수행하는 곳이 드물다고 생각한다. 정말 ‘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듯이 일하구나’라고 접했던 곳은 ‘알라미’라는 제품을 만드는 ‘딜라이트룸’밖에 없었다. 조직문화, 재무상태 등 정말 이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싶은 곳은 이 한 곳 뿐이었다.
[판타지가 깨졌다고 해서 판타지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화가 난다. 존폐 여부로 치열하게 살면서도, 꿈으로 가득 차야했던 스타트업을 누가 이렇게 병들게 만들었을까. 워낙 현장에서 말솜씨가 떨어지기도 하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해, 면접의 막말 질문에도 제대로 응수하거나 대응하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에서라도 말해보고 싶다.
(1) ”근데 한국에서 그게 실천 가능하던가요 ㅋ?”
⇒ 최소한 제가 몸담은 조직의 팀원끼리는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서로 오해가 있던 부분을 찾아 긁고, 일이 되지 않는 이유를 찾아 풀어내는 게 저의 직무적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제가 몸담았던 프로젝트들의 팀원들은 업무 진척에 만족했고, 번아웃이 와 지친 팀원들 보듬으며 함께 나아가기 위해 몇 시간을 통화한 적도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비록 큰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제가 목표로 하고자 하는 ‘그것’이 가능하단 것의 단서를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2) ”왜 하나 했네 ㅋ”, ”그거 해봤자일텐데요? ㅋ”
⇒ 사람들과 더 잘 일하기 위해, 상대의 업무 스탠스를 공감하기 위해 깊이를 좀 더 높여나가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쫀다고 해서 일이 ‘성공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최소한 들어보고, 그게 타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게 장기적으로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팀원을 믿지 못한다면, 신뢰하지 못하여 무조건적으로 쪼아야 하는 객체로 본다면, 그건 인사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으며,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된다.]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의 'You’re on Your Own Kid'는 힘들 때 가장 많이 듣는 곡이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으며, 상처는 전염된다. 최소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Cause there were pages turned with the bridges burned
지난 날의 아픔을 뒤로하고 새 장이 열려가잖아요.
Everything you lose is a step you take
잃은 것도 결국의 성장의 한 과정이랍니다.
So make the friendship bracelets, take the moment and taste it
그러니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현재를 온전히 즐겨요.
You've got no reason to be afraid
앞날을 벌써부터 두려워 할 이유는 없어요.
예전 감명깊게 들었던 교양 수업에서 뇌리에 꽂힌 말이 있다. “감성이든, 이성이든 극단으로 닿으면 둘다 야만이 된다.” 사람이기에 둘 중 어느 하나로 판단될 수 없다. 합리란, 이치에 맞음을 의미한다. 최소한 나는 이치에 맞고 상식적으로 흘러가는 현실이 되도록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사람이다.
아무리 썩어 병들어가는 사회와 업계라지만, 최소한 분노를 재생산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원하는 이상을 이룩하기 위해 꾸준히 계속 공부해 나갈 것이고, 의미있는 새살이 돋아나는 새로운 세포의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오늘이다.
You're on your own, kid (ah)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해요.
Yeah, you can face this (ah)
그래요, 해낼 수 있어요.
You're on your own, kid
스스로 해내야 하는 거에요.
You always have been
늘 그래왔잖아요.
- 2024년 8월 21일, 불확실성 속에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길 바라는 마음에 쓰는 일기